<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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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나는 그날 따라 술을 마구 들이켠 것 같았다.마구 몸을 흔들며 춤을 추었고 마구 소릴 질러가며 무언가를 말했다.이거 낙오자가 되면 안된다고 자꾸만 겁들을 주는데 미치겠단 말이야.우리중의 누군가가 그랬다.
우리는 그날 다들 제각기 머리 속과 마음 속이 복잡했던 것 같다.집과 학교…공부와 의리…계집애들과의 달콤한 시간과 온갖 유혹들…막막한 내일…그런 것들이 우리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어쩌면 그날 이후 우리 악동들도 「어쨌든 함께」에서 「뿔뿔이」제갈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음악소리가 잦아들고 잠시 땀을 식히는 시간이었나 보았다.
『자 이렇게 해봐.손가락을 이렇게 세우고 한쪽 눈을 감아봐.
』 승규였다.녀석도 약간 혀가 풀린 상태였다.손가락 하나를 곧추세워서 자기 코 앞에 들이대고 있었다.
『그리구 말이야.눈을 서로 바꿔보라구.이번엔 이렇게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을 떠보란 말이야.손가락이 있는 자리가 변하잖아.손가락 뒤에 있는 모든 것들이 놓여 있는 자리가 변하잖아.너두 직접 해보라니까.변하지?어느쪽 눈으로 보느 냐에 따라 보이는 것들이 있는 자리가 다 변하잖아.』 나도 승규가 하라는대로 따라 해보았다.영석이는 속이 불편한지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정말이었다.어느쪽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놓여 있는 자리가 변했다.상원이와 나는 너무나 신기해서 자꾸만 양쪽 눈을 번갈아 뜨고 감았다.
『이게 바로 관점이라는 거야.사실은 나도 우리 아버지한테 얼마 전에 배운 거지만 말이야.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한순간에 팍팍 변할 수도 있다는 거야.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이거야.내말은…분명하게 옳은 것도 분명하게 잘못된 것도 없다 이거지.그러니까 결국 세상에 정답이라는 건 없다는 거야.기껏 해야 모범답안이 있을 뿐이라는 거 아니냐.결국각자 사는 거라구.안그래,각자….』 쿵쾅 쿵쾅 음악이 바뀌고 있었다.두박자짜리 레게였다.
『야 이 새끼야 춤이나 춰.누가 너보구 뭐라 그랬느냐구 벼엉신.』 영석이가 갑자기 일어나서 승규를 홀로 잡아끌었다.승규가하는 말을 다 듣고 있었나 보았다.
테이블에 남았던 상원이가 어 저거봐 라면서 한곳을 가리켰다.
『저기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늘어뜨린 거 갈보잖아.우와 쟤 정말이네.』 『계갈보…그지,저 치마 좀 봐.와 죽이는데.』 계희수가 진짜 이름이었고 갈보는 별명이었다.2학년 1학기 때부터어디선가 훌쩍 날아와서 섞인 우리학년 계집애였다.미국에서 왔다고 했는데,하고 다니는 행색도 요란했고 하는 짓도 괴팍해서 마침내 계갈보라는 호칭을 얻게 된 계집애였다.
계갈보는 재수생 아니면 대학생쯤 되는 놈들 하고 섞여서 야한춤을 추고 있었다.머리는 양쪽으로 땋아서 가슴께로 늘어뜨렸는데그래서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중학교 계집애처럼 보였다.거의 팬티가 보일락 말락 하는 짧은 치마(어딘가에 앉으면 분명히 팬티가 보일 거였다)밑으로 삐져나온 두 다리를 잔뜩 벌리고 서서허리와 궁둥이와 가슴만 꿈틀거리는 묘한 춤이었다.
『저 갈보 웬 대학생 새끼랑 동거한다는 소문 들었니.』 상원이가 갈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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