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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저를찾아서>"여성의 신비" 베티 프리던著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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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18세기 말부터 움트기 시작했던 서구여성들의 여성해방에 대한요구는 영국과 미국에서「무장투쟁」이라고 불릴만큼 치열했던 1920,30년대의 참정권 운동이 마무리되면서 일단 가라앉는 듯이보였다.아버지나 남편의 의사가 아닌 여성 자신 의 뜻대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여성들도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 국가가 처음으로 인정하게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제 여성들은 오랫동안의 투쟁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흡족해 하면서 전쟁 전후의 위기 시기에 남성들을 대신해서 맡아 왔던 바깥 일을 되돌려 주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오면서 가장 풍요를 누리던 미국여성들을중심으로 느닷없이 자신들이「억압」받아 왔으며 그 사실이 교묘하게 은폐되어 왔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행복한 가정주부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천명이었으며 여성 해방은 여성이사회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60년대에 와서 새로운 여성운동이 일게 되었을까.그 원인은 몇 가지로 거론되는데,첫째는 여성에 대한 교육기회의 확대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급증했다는 점,둘째는 출산 자녀수의 감소와 수명 연장으로 여성의 생활주기가 앞세대와는 비교가 안될만큼 달라졌다는 점,셋째 유용한 생활기기가 속속 보급됨에 따라 가사부담이 현저히 줄어 들고 여성의 여가 시간이 대폭 늘어난 점과 60년대의 사회운동들,그리고 반전 반인종주의 반문화 운동의 영향으로 여성들이 사회 의식이 제고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욕구도 크지만 그 반면 전통적인 여성적 삶의 테두리를 벗어난다는 데 두려움을 느끼던 대다수의 중산층 여성들에게는 그들의 상황과 심리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들이 느끼는 불만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운동으로 점화시켜줄 촉매가 필요했다.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결정적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한 권의 책이 있었다.1963년,베티 프리던(1921~)이 펴낸『여성의 신비』(Betty Friedan,Feminine Mi3ti que)였다.
『여성의 신비』가 출간된 이후 짧은 시간 동안 여성해방에 관한 괄목할만한 책들,예를 들면 메어리 엘만의『여성에 관한 사색』(1968),로빈 모건의 선집『자매애는 강하다:여성해방 논문선집』(1970)과 케이트 밀레트의『성의 정치학 』(1970)들이 잇따라 나왔지만,프리던의 이 책이야말로 현대여성운동의 실마리를 푼 기념비적 사건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이다. 『여성의 신비』는 가정주부와 어머니로서 성공한 행복한미국여성이라는 지배적인 문화적 영상을 여성의 경험을 통해 해부하고 비판한 책이다.프리던에 따르면 40년대와 50년대에 특히여성다움에 대한 신비화가 조장되었으며 이상적인 여성상 은 교외에 떨어진 집에서 요리를 만들고 엎드려서 마루에 윤을 반들반들내고 백설처럼 새하얗게 이불 호청을 빨고 잠시도 아이들에게서 한눈을 팔지 않는 여성,덧붙여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는데 게을리하지 않는 여성으로 典範化되었다는 것이 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화는 학교교육을 통해서나 여성잡지들,텔레비전 광고들,영화나 소설,또 소위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회학자나 심리학자.정신분석가들의 글을 통해 창조되고 강화되었기 때문에 여성들 스스로 이런 가치를 내면화하게 된다.동시에 여성들은 교육권.직업권.참정권을 위해 열심히 투쟁했던 초기의 여성해방운동가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도록 유도되어 왔다.
여성들은 만들어진 이미지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구성하고 현모양처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데서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도록 길들여져 갔다.그러나 실제로 여성들은 아내나어머니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 행동하 고 싶은 욕구와 여성의 신비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고 심한 죄책감과 불만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갈등은 사회에서 일부여성.문제여성들의 부적응의 문제로취급되어 왔으며 여성 자신들 누구도 자기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려하지 않았다.프리던은 이것을「이름없는 병」-여성이 인간으로서 자기자신을 바라보면 누구나 앓을수 밖에 없는 병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이제 사회는 더 이상 여성에게 불필요한 선택,즉 사회적 책임과 어머니 역할 중에서 하나를 무의식적으로 포기하게끔 하는 선택을 강요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여성 각자가 여성의 신비를 벗어나 삶의 계획을 새롭게 세운다면 두가지 책 임을 동등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프리던은 여성이 주체성과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경제적 독립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여성이 돈을 벌지 않으면서 어떻게 평등권과 인간존엄성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따라서 앞으로 여성운동의 과업은 여성으로 하여금 완전한 인간이 되지 못하도록 막아 온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는 것,즉 도처에 편재된 여성적 신비를 벗겨 내고 동시에 여성해방을 위한 오랜 투쟁에 새 힘을 불어 넣는 일이어야 한다.프리 던은 이 책에서 남성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남성 역시 켸켸묵은 남성적신비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희생자라고 말한다.
『여성의 신비』는 출간된지 15년후에 한국여성들과 만난다.70년대 후반은 여성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고 몇몇 대학에서 여성학 강좌가 개설되기 시작하던 때였다.서구에서 처럼 이책이 대중적인 관심을 끌기에는 조금 이른 때라고 하겠다.
오히려 30년이 지난 90년대 오늘이야말로 프리던이 제기했던문제들을 우리와 연결시켜서 차분하게 검토해도 좋을 시점에 이른것이 아닌가 싶다.해방후 제대로 교육받은 첫세대 여성들이 40~50대의 가정주부로서 여성의 신비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고 있으며 그 한편에서 그들의 딸들인 20~30대 여성들은 가정과사회적 책임을 양립하고 싶은 욕구와 현실적 문제사이에서 여전히양자택일을 강요 받고 있다.또한 그보다 어린 여성들은 이러한 틈새를 비집고 스며든 새로운 형태의 여성적 신비,신세대적인 신데렐라의 꿈에 사로잡혀 아예 능력쌓기를 포기하는 것같다.게다가그 동안 이루어낸 경제적 풍요는 여성의 신비를 더욱 공고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프리던도 당시 미국 여성들의 조혼경향에 대해 상당한 우려를 나타냈다.
이 책이 여성해방의 고전으로서 계속 유효하다면 시대와 장소를떠나서 여성의 신비가 보편화된 곳이면 어디서든지 그 신비를 벗겨 내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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