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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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3.실종 ○38 『그럼 결국 너희들이 재미만 보구 끝난 거네.써니 냄새는 맡지도 못하구 말이야.』 푸케트에 다녀온 영석이가 우리집에 놀러와서,자신이 한국을 비운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싶어 했다.
『더이상 우리로선 어쩔 수가 없었어.이젠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어.』 『기다리긴 뭘 기다려.가버린 애한테 미련 갖지 말라구.』 『…거긴 어땠어.푸케트라는 데는 좋았니.』 『우리끼리 갔으면 모를까,무슨 재미가 있겠느냐구.그저 비키니 입은 계집애들왔다갔다 하는 걸 멀리서 보구 그랬지 뭐.…근데 이건 뭐야?』영석이가 양미간을 좁히면서 내 책상 위에 붙은 시간표를 들여다보았다. 『완전히 새나라의 어린이네.너도 거듭나기로 한 거야 상덕이처럼?』 『님도 잃어버리구…수양삼아 공부나 해야지 뭐.』내가 말해놓고 내가 우스워서 히죽 웃었다.
『야 이거 하나씩 다 타락해버리고 나면 우린 어떡하라는거냐.
그 공부라는데 한번 물들면 사람이 아주 달라지더라니까.이거 큰일났네.』 그러는데 어머니가 내 방으로 들어와서 과일이 담긴 접시를 놓아주고 가면서 한마디하셨다.어머니는 다목적으로 그런 말을 하셨을 게 분명했다.
『영석이 너도 시간표 새로 짜야지.우리 달수 거 봤어?』 어머니가 방을 나가자,뒷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영석이가 마치 뼈 있는 말이기라도 한 것처럼 한마디를 했다.
『짜아식 좆나 귀염받게 생겼군.』 그런 다음부터 영석이와 말이 잘 풀리지 않았다.서로 헛소리들만 픽픽해대다가 애매한 분위기가 돼 버렸는데,그러다가 영석이는 저녁밥도 안먹고 가버렸다.
왕박은 말했었다.공부가 무조건 좋기만 한 건 아니라구.세상엔좋은 것들이 많구 공부도 아마 그중의 하나일 거란 말이지.공부를 하려면 그만큼 다른 좋은 것들을 잃는 것들도 있을 거란 말이야. 하여간 나는 다음날 왕박을 좇아서 물리 특강이 있다는 학원으로 갔다.우리 학교의 물리 선생은 별명이 제물포였는데,특강을 하는 물리 선생 이름이 제물구라고 돼 있었다.원래는「쟤 때문에 물리 포기」의 준말이 제물포라는 별명이었는데「윙 가 물리를 구제해준다」고 해서 제물구라는 거였다.
학원 선생들은 그런 식으로 웃기는 사람들이 많았다.웃기면서도진짜로 그놈의 구제 불능인 물리를 구제해주기만 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방학인데도,강당을 개조한 특강 강의실에 아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와 이렇게들 놀지도 않고 지랄스럽게 공부를 해대니까 서로 대학 가기가 더 어려워지는 거였다.삼사백 명은 족히 될 거였다.젊은 아이들의 몸에서 뿜어대는 체열 때 문에 실내가후끈거렸다.무슨 헤비메탈 그룹의 공연장이라고 해도 이렇게 열기가 뜨겁지는 않을 거였다.
자 오늘은 예상문제 총정리라고,가수처럼 마이크를 멋있게 돌려잡은 제물구 선생이 그랬다.
달의 표면에서는 지구에서보다 중력 가속도가 6분의1로 작아진다고 할 때 물체가 자유낙하하는 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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