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72.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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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통령 탓할 거 없어.내가 너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데….』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셨다.이건 어머니가 즐겨 쓰는 말이었는데,뜻인즉 어머니가 자식인 나 하나를 마음대로 못하는데 대통령이 자기 마음대로 척척 나라를 이끌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뭐 그런 뜻이었다.아니 이것도 좋은 설명은 아닌 것 같다.어머니 말씀은,자식도 마음대로 못하는 어머니 자신이 한심하다 그런 뜻인 것 같았다.하여간 어머니가 곧잘 당신과 대통령을 비유하시는 건 대단한 유머감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너 지난번에 엄마가 학교에 불려갔다 와서도 너한테 아무말 안했잖아.이젠 너도 다 컸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그런 거야.그런데 넌….』 내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자 어머니가 시작하셨다.나는 이제부터 어머니가 할 이야기들을 대강 다 외고 있었다. …그래 달수 니 말대로 사람이 미분 적분 잘 푼다고 행복하게 사는 건 아닌지도 모르지.공부 잘 한다고 세상을 잘 사는 건 아닐지도 모르지.강화도에 처음으로 쳐들어왔던 프랑스 군함의 선장 이름을 안다고 남보다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니 겠지.
그렇지만 공부 잘하는 사람을 세상이 좋아하는 건 말이야,적어도그 사람의 성실성이 보장되기 때문일 거라구.얼마나 한가지에 집중해서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인가,얼마나 꾸준히 자기 할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가,그런 게 결국은 성 적으로 나오는 거거든.안그래.
어머니의 또다른 이론도 나는 알고 있었다.
…가만히 음악을 듣고 있다고 생각해봐.너희들이 요즘에 좋아하는 시끄러운 노래들이 계속해서 나오면 너는 장단을 맞추면서 좋아할 거야.그렇지만 클래식 음악이 나오면,넌 그런 음악은 좋아할줄 모르지,넌 금방 지겨워서 못견뎌할 거야.잘 생각해봐.이것저것 아는 게 많은 사람들이 남보다 더 많이 세상을 즐기면서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거라구.
그런데 어머니는 그날 따라 내 예상을 깨고 다른 말씀을 하셨다. 『엄마한테 다 말해봐.무슨…문제가 있니.』 『…….』 나는 어머니가 내 일기를 훔쳐본 것 아닐까 하고,일기에 어떻게 썼더라 하고 따져보았다.일기를 쓰는 게 여러가지로 좋다는 말도어쩌면 엄마들이나 선생들에게 좋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엄마한테는 말해줄 수 없는 거니.』 『써니라는…여자애가 있거든요.마석에 같이 갔던 앤데요….』 나는 어디까지 어머니한테털어놓는 것이 적당한 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같이 잤어? 그 써니라는 애하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써니가….』 나는 약간 짜증을 냈다.같이 자고 안자고 하는 것으로 모든 걸 판가름하려는 어머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였다.
『써니가 행방불명이 돼버렸거든요.』 『뭐라구? 그게 언제지?』 『보름쯤 됐어요 벌써.』 『가출한 게 아니구?…그래서,그래서 니가 그애를 찾으러 쏘다녔다 이거니.』 『그래요,난 방학동안에도 그애를 찾아봐야 돼요.그렇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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