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논란 이중섭·박수근 그림 2827점 일부 50년 전 여중생이 그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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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씨로부터 검찰이 압수한 풍경화.

박수근 화백의 서명이 담겨있는 그림의 뒷면에는 ‘중학교 제이학년 15번 李來蘭’이라는 글귀가 연필로 쓰여있다. [SBSTV화면 촬영]

이중섭(1916~56).박수근(1914~65) 화백 작품의 위작(僞作) 논란을 일으켰던 한국고서연구회 고문 김용수(69)씨의 소장 그림 2800여 점이 모두 위작으로 검찰 수사에서 판정됐다.

특히 이 중 20여 점은 약 50년 전 여중생이 그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그림의 뒷면에는 '태안중학교 제이학년 李來蘭(이래란)'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래란(66)씨는 검찰에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머니를 포함한 가족으로 내가 그린 그림이 틀림없다"며 "45년 전 결혼하며 친정에 놓고 간 그림들이 어떻게 박수근 화백 작품으로 둔갑됐는지 모르겠다"고 진술했다. 김씨에게서 압수한 이 그림에는 박수근 화백의 서명이 담겨 있었다.

이 사건을 수사해온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16일 "2년여 동안의 다양한 검증 작업을 통해 위작 가능성이 제기된 그림 모두가 가짜임을 밝혀냈다"며 "이번 주 안에 김씨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씨에게는 사기미수.서명위조.무고 혐의가 적용될 것으로 알려졌다. <본지 8월 3일자 1면>

김씨 소장 그림에 대한 위작 논란은 2005년 3월 시작됐다. 당시 이중섭 화백의 차남 이태성(일본 거주)씨가 S옥션 경매에 부친의 작품이라며 그림 8점을 내놓았다. 그러자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이를 '위작'이라고 주장하고, 배후 인물로 김씨를 지목했다.

검찰은 2005년 수사 착수 직후 김씨로부터 2827점(이중섭 1067점, 박수근 1760점)의 그림을 압수해 진위를 조사해 왔다.

최명윤(문화재보존관리학과) 명지대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 10여 명에게 감정을 의뢰하기도 했다. 감정은 ▶서명 ▶은지화(銀紙畵)에 사용된 은박지 ▶그림의 물감에 초점이 맞춰졌다. 감정단은 두 화백의 서명에 대해 '위조 흔적이 있다'는 의견을 냈고, 은박지가 이중섭 화백이 활동하던 시기에 쓰였던 게 아니라고 판정했다. 이 화백은 담뱃갑 안에 든 은박지에 자주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감 부분에선 압수된 김씨 소장의 그림에서 금속성 광택을 내는 '펄(Pearl) 성분'이라고 불리는 '산화티탄피복운모'가 검출됐다는 점이 유력한 위작의 증거가 됐다. 이 성분은 두 화백이 작고한 지 수십 년 뒤인 80년대부터 그림 물감에 섞여 사용됐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김씨의 소장 그림 중엔 지미 카터(1924년생) 전 미국 대통령의 60대 때 초상화가 포함돼 있고, 먹지를 대고 밑그림을 그린 흔적이 있는 그림이 상당수 있었다고 검찰 관계자는 밝혔다. 수사팀은 "김씨가 그림을 100~200점씩 유통시키려 했다"는 화랑 관계자의 진술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11~12일 김씨를 소환해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았다. 또 김씨와 가짜 그림 유통을 공모한 혐의로 명문 사립대 교수 A씨에 대한 수사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A씨가 위작임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메모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이상언 기자

◆산화티탄피복운모=운모(雲母.화강암에 많이 들어 있는 규산염 광물)에 인공적으로 산화티타늄을 입힌 물질. 차량의 금속성 광택을 내는 도료에 섞여 사용된다. 1980년대 초반 해외에서 그림 물감에 광택을 내는 성분으로 사용됐다. 박수근.이중섭 화백의 생존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물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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