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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종말>9.프랑코-군부독재 전형 40년 鐵血통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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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독재자는 으레 국가와 민족을 내세운다.착각이든 가식이든,아니면 진심이든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독재를 정당화 한다. 37년간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독재의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스페인의 철혈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내걸었던 것도 바로 국가와 민족이었다.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 사랑하고 내 생애의 마지막 호흡까지다바쳐 봉사하기로 맹세한 것은 나의 조국 스페인이었다…』는 유언의 한 구절처럼 마지막 눈을 감던 순간까지 프랑코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진정 국가의 단결과 민족의 번 영이었던가.
1936년 7월 스페인내전을 일으켜 독재자로 발돋움 하기 전까지 프랑코는 뛰어난 군인이었다.식민지 모로코에서 쌓아올린 빛나는 전과로 불과 34세에 별을 단 프랑코는 유럽의 최연소 장군으로 스페인 역사상 가장 촉망받는 군인 가운데 한명이었다.효과적인 식민지 경영을 목적으로 외인부대 창설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 그러나 北아프리카에서 악명을 떨친 외인부대가 그의 지휘아래 본토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타고난 군인이었고,군인의 신분을 이용해 정권을 잡았다.독재정권을 유지하는데도 최대한 군을 활용했다.또 죽을 때까지 3군사령관의 지위를 놓지 않았다.프랑코 독재는 20세기 군부독재의 典型을 이루며 아프리카와 아시아등 제3세계에 서 수많은 추종자와 모방독재를 낳았다.프랑코에게도 스승은 있었다.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조국을 구한다는 명분 하에 1923년 쿠데타를 일으킨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장군이 그의 스승이었다.36년2월 총선에서 좌파공화주의자와 사회당.공 산당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압승,공화파 인민전선 내각이 출범하면서 左右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혼란을 거듭하던 스페인은 급속히 좌경화의 길을 걸었다. 파시스트정당인 팔랑헤당은 불법화되고 그 총수는 체포됐다.전통적으로 스페인의 보수우익진영을 지탱해온 군부와 교회.대지주.자본가들 사이에 급속히 고조된 불만과 위기감 속에서 프랑코는 재빨리 기회를 포착했다.
북아프리카 주둔군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반란군이 본토진격을 개시하면서 스페인은 약2년반에 걸친 더러운 내전의 시궁창에 빠져들었다.1백만명의 희생자를 내는 스페인 사상 최악의 피의 살육전 끝에 얻어낸 내전의 승리는 그후 40년 가까이 지속된 프랑코 독재를 떠받치는 기둥이 됐다.스페인내전은 보수와 혁신,전통과 이상,현실과 도전이 양립하는 두 얼굴의 스페인이 끝내 공존과 타협의 길을 찾지 못하고 빚어낸 파열음이었다.그 결과는 보수와 전통을 옹호하는 세력의 일방적 승리였다.그러나 승리의 대가로 지불한 엄청난 양의 피는 집권기간 내내 프랑코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었다.그럴수록 그는 반대세력에 대한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프랑코 독재하에서 자유와 진보 세력은 국외로 탈출하거나 은신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신문사 주필의 임면권까지 국가가 장악할정도로 그의 사상통제는 철저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들이 결국은 반대세력과의 대화와 타협을모색하는 일반적 경우와는 완전히 軌를 달리 했고,그것이 그의 40년 독재를 가능케 했다는 평가도 있다.
***經濟발전 뒷걸음 이것만으로 그의 장기독재를 설명할 수는없다.그가 내세운 구호는 스페인의 영광 재현이었다.과거 절대주의 왕정시대 세계를 제패했던 위대한 조국 스페인의 재건을 국민들에게 호소하며 외교와 국제정치에서 독자노선을 추구했다.경제 내셔널리 즘도 그의 단골메뉴였다.죽기 직전까지도 대중집회에 참석,외국의 간섭 반대와 국민적 단결을 소리높이 외쳤다.
그러나 그는 이사벨라여왕과 페르난도왕의 영광스런 전통을 잇는다는 統領의식에 사로잡혀 스페인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지연시켰고 神과 역사의 이름으로 전횡을 일삼았다.
『나를 敵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을 내가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같이 그들도 나를 용서해주길 빈다』는 마지막 말과 함께 프랑코는 82세를 일기로 사망,40년 장기독재의 막을 내렸다.
〈裵明福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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