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검은 말한다, 알아듣는 사람에게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1호 08면

은행 지점장인 40대 중반의 A씨가 사망했다. 발코니에 잠옷 차림으로 쓰러져 있는 그를 발견한 부인은 즉시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사망원인도 알 수 없었다. 부검이 필요하다는 검시관의 판단에 따라 A씨의 시신은 한 부검의에게 배당됐다.

법의학자가 말하는 검시와 부검

시신에는 이마에 생긴 작은 상처가 보일 뿐 특별한 외상은 없었다. 본격적인 부검이 시작됐다. 심장동맥에 가벼운 동맥경화증 말고는 특별한 병이 없었다. 각종 장기에도 이상이 없었다. 모든 사항을 조목조목 기록해 나갔다.

부검의는 조직검사를 하기 위해 심장과 다른 몇몇 장기에서 조직을 떼어냈다. 그리고 위액·혈액·담즙·소변을 독극물 검사로 보냈다. 부검은 끝났지만 사인은 알 수 없었다.

이틀 뒤 완성된 조직 슬라이드에서도 특별히 사망원인이 될 만한 질병의 증거는 없었다. ‘무소견 부검(negative autopsy)’이다. 무소견 부검은 사망원인을 설명할 질병이나 손상을 부검에서도 찾지 못한 사례를 말한다. 부검의에게는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실마리는 독극물 검사실에서 보내온 검사 결과에서 풀리기 시작했다.

혈액에서 코카인이 검출된 것이다. 코카인 양이 치사량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코카인은 일상적인 양을 사용하더라도 치명적인 심장 부정맥이나 뇌출혈을 일으키기도 한다. A의 사망원인은 코카인 흡입으로 인한 부정맥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부검의는 담당 형사에게 사망원인이 코카인 중독이라고 알려준 뒤 다시 A씨의 주변을 조사하라고 부탁하였다. 며칠 뒤 A씨의 사무실 서랍에서 코카인을 발견하였다는 회신을 받았다. 이 사건은 과거 필자가 미국에서 경험한 사례로 부검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변사체를 의학적으로 검사하는 일을 검시(檢屍)라고 한다. 검시의 목적은 객관적인 의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사망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가 죽음과 관련된 상황 정보이고, 둘째는 자세한 검시와 검사이며, 셋째는 상황 정보와 검시 결과를 바탕으로 내린 합리적인 판단이다.

우리나라에도 검시제도가 있다. 다만 검시관을 따로 두지 않고 검시 대상을 법률로 정하지 않았다. 부검 시행 여부를 수사의 주체인 검사가 결정하고, 법원의 영장이나 유족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검시에서 얻은 정보는 수사관에게 제공하여 수사의 범위와 방향에 도움을 줘야 한다. 또 수사관도 검시 의사에게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주어야 상황 정보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검시는 범죄 해결뿐 아니라 또 다른 문제에도 쓰일 때가 있다. 사망자 본인이나 가족이 알지 못했던 질병이 있었는지도 밝혀야 하고, 죽음에 다른 사람의 고의나 과실이 있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보험처럼 유가족이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문제 해결에도 사용된다.

어떤 부검이 잘 된 부검인가? 가장 훌륭한 부검은 나중에 제기될 질문에도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임상의사의 오진(誤診) 가능성만큼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부검에서도 오판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주검은 많은 말을 한다. 다만 알아듣는 사람에게만 말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