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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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써니의 침대에서 일어나 어둠 속에서 옷을 찾아 하나하나 몸에꿰면서 나는 언젠가 어떤 코미디언이 하던 우스갯소리가 떠올라서피식 웃었다.남자하고 여자하고 하고 나면,남자 중의 10%는 담배를 피우고 10%는 등을 돌리면서 돌아눕고 ,그리고 나머지80%의 남자는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간다던.
써니는 가만히 침대에 그대로 누워서 내가 옷입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내가 옷입기를 마쳤을 때 써니가 두 팔을뻗었다.나는 써니에게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고 입을 맞췄다.
『…갈게.푹 자.다른 생각 말구.』 희미한 어둠 속에서 써니가 고개를 끄떡이는 것이 보였다.
침실에서 거실로 내려오는 나무계단을 내려와 현관에서 대문으로이어지는 벽돌계단을 하나하나 걸어내려와 나는 밖에서 대문을 꽝닫았다.그것으로 써니와 떨어져 다시 세상에 섞인 거였다.
거리의 사람들은 변함없었다.어떤 사람은 빨리 걷고 어떤 사람들은 천천히 걸었다.어떤 남자는 주위를 살피면서 걸었고 어떤 여자는 땅만 보며 길을 걷고 있었다.
밤11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버스 정류장에는 여전히 사람들이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늘 똑같은 사람들이었다.혹은 매번 다른 사람들이겠지만 다들 별 차이가 없었다.자기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얼굴들….
이상한 일이었다.가령 집안 식구 중의 누가 어느날 밤 갑자기새끼 손가락을 절단하는 사건을 겪은 얼굴이라든지 아니면 어느날느닷없이 처음으로 남자나 혹은 여자를 경험하게된 얼굴이라든지,하다 못해 학교에서 정학이라도 당한 얼굴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용케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같은 얼굴을 하고 버스를 기다리고 길을 걷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그러면서 사는 거였다.그리고 써니도…써니도 어제까지와 비슷한 표정과 말과 생각으로 내일과 모레를 살아갈 거였다.
그런 생각들은 나를 약간 울적하게 만들었다.
벨을 누르니까 어머니가 대문을 열어주셨다.
『도서실에서 오는 거니.저녁은 어떡하구….』 『안녕히 주무세요.엄마.』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면서 내 방으로 들어갔다.내가엄마에게 존대말을 쓸 때에는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엄마는 그런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겉옷을 대강 벗어던지고 싱글침대에 파고 들었다.정말이지몸과 마음이 다 피곤하였다.스탠드 불을 꺼버리니까 바로 한 시간 전까지 써니의 침대에 누워 있었을 때와 분위기가 비슷하였다.써니는 싱글침대에서 함께 있는게 좋다고 했었다 .
나는 팔베개를 하고 똑바로 누워서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막 겪은 긴장과 당혹과 경이와 환희와 평화를 떠올렸다.써니의 숨소리가 귓전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이거였을까,우리가 그렇게도갈망하며 감각하기를 기다렸던 어른들만의 비밀이 이거였을까.
우리가 서로 실습용은 아니잖아….
써니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나는 어른세계에 대한 또다른 혼돈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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