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군사적 신뢰구축이 먼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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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중에서도 남북한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 구축 문제와 관련, 남한 국방부 장관과 북한 인민무력부장(국방장관 해당) 간 회담을 올해 11월 중 평양에서 개최키로 합의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6·15 정상회담 이후 지난 7년간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과 군사실무회담이 30여 차례 개최된 바 있으나 남북 국방장관회담은 우리의 계속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단 한 차례로 끝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11월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는 서해 해상에서의 공동어로수역 지정 및 평화수역화 방안과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 문제 등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를 협의하기로 양 정상이 합의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북한은 남북 군사회담에서 남북 간 실질적인 긴장완화나 군사적 신뢰 구축에는 매우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북한은 군사적 신뢰 구축 문제를 사실상 그들 체제에 대한 위협과 도전으로 간주하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반면 북한은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서해 해상경계선 재설정을 빠짐없이 요구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11월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우선적으로 협상할 것을 주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서해 해상경계선 문제를 거론하고 나올 경우 기존 NLL을 ‘서해상 불가침경계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1953년 이후 지금까지 준수돼 온 NLL의 국제법적 타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가 야기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남북은 교류협력을 본격화·제도화해 나가면서 상호 안보위협을 최소화해 나가야 한다. 이와 함께 남북 쌍방 간에 정치·경제적 이익을 공유하고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점진적으로 강구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북한이 NLL을 준수한다는 전제로 남북 양측은 단계적으로 NLL의 군사적 의미를 경제적 의미로 전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은 본격적인 경제적 협력을 위해 점진적으로 서해 해상에서의 공동어로수역 설정을 비롯한 경제·과학·기술 관련 공동협력 방안을 적극 모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해 해상 경제협력을 구체화해 나가는 과정에서 제기될 수 있는 각종 군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실무회담을 적극 유도해 나감으로써 이를 서해 해상의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한 토대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는 남북합의서의 조항에 근거해 서해 해상경계선 재설정을 위한 협상을 당장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남북한 군사적 신뢰 구축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남북한의 군사적 신뢰 구축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서해 해상경계선 재설정 문제를 먼저 논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서해 해상에서의 ‘평화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실질적인 남북한 군사적 신뢰 구축이 먼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11월에 개최되는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며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들을 도출해 내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영태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