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뇌 속을 손금 보듯 … 63. 네 명의 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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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필자(앞줄 맨 왼쪽)가 1985년 과기처 공무원 등에게 연구 성과를 설명하고 있다.[KIST 이순재 영상담당 제공]

다른 교수의 연구실에 있는 대학원생들은 내 연구실을 부러워했다. 네 명의 비서와 제도사 등이 근무하고 있었다. 또 시중에서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생수를 먹을 수 있었고, 개인별로 고급 책상을 썼다. 대학원생들을 최대한 귀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게 내 방침이었다.

1983년 MRI를 개발하고 나서였다. KAIST 교수 연구실에는 대부분 비서가 없었다. 연구비가 적어 비서를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비서 월급도 연구비에서 줘야 했다. 내 연구실 근무자들은 눈코 뜰새 없이 바빴다. MRI 상용화뿐만 아나라 새로운 연구 과제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원생 수도 많아졌다. 덕분에 연구 논문이 급증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새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대학원생들이 논문 작성 때 복잡한 수식을 많이 써야 하고, 복사를 해야 하는 등 연구 외 잡일에 신경 쓰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비서 네 명과 제도사를 채용했다. 요즘에야 수식을 컴퓨터로 쉽게 쓸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많이 나와 있지만 그땐 거의 수작업으로 입력해야 했다. 인문학과 달리 공학에는 매우 복잡한 기호가 많다. 그런 것을 그리다시피해 입력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이런 일에 대학원생들이 시간을 뺏기는 게 아까워 논문 타이핑 전문 비서, 복사나 잡일 담당 비서, 제도 담당 비서 등 업무별로 비서를 썼던 것이다. 당시 KAIST에서 네 명의 비서를 쓰는 교수는 한 명도 없었다. 이 덕분에 나와 대학원생들은 타이핑 같은 단순 작업에 많은 시간을 뺏기지 않아도 됐다.

우리는 연구실에서 다이아몬드표 생수를 마셨다. 당시 미군 부대 등 특수한 곳에서나 이런 생수를 먹었다. 지금이야 생수를 비치해 놓은 곳이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생수는 귀했다. 사무실이나 집에서 먹기에는 생수 값이 너무 비싸고, 그런 것을 먹는 사람들은 사치스럽다고 할 때였다. 물까지 사 마시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연구실에서 생수를 먹게 했다. 혹시 아무 물이나 먹다가 탈이라도 나면 연구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다시 말해 수십억원을 써서 연구하는데 몇 푼 안 되는 생수 비용으로 문제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하루 24시간을 3교대로 연구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스키를 좋아하는 나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강원도 용평으로 스키를 타러 간 적이 있다. 큰 봉고차 한 대에 일행이 모두 탈 수 있었지만 나는 두 대를 빌리도록 했다. 혹시 사고라도 나면 연구실 문을 닫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원생들과 함께 스키장 등에 갈 땐 항상 차량을 두 대 빌리도록 하며 “너희가 없으면 모든 연구가 중단되기 때문에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 말을 듣고 대학원생들이 처음에는 웃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들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 덕에 스키를 배운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가끔 기업 자문료로 받은 목돈의 일부를 학생들에게 줬다. 그러면 그들은 단체 회식비로 쓰기도 했다.

조장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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