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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풍족하게 자란 세대 그들의 무기력한 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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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격투하는 자에게 동그라미를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들녘, 286쪽,
1만원

“열대 우림의 석탑 안에서 공주.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코끼리를 한 마리씩 데려와 대기하고 있다. 코끼리는 주인을 상징한다. 공주가 선택하는 코끼리의 주인이 그의 배필이 된다. 공주는 선택을 하기 앞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여기서 공주는 이 소설의 주인공 가나코다.

80년대 버블경제기에 태어난 가나코는 대학 졸업을 앞둔 예비 백수다. 지독한 만화광이었던 그는 출판사에 취직해보려고 하지만 녹록치 않다. 면접에서 무시당한 뒤 “두 번 다시 안 올 것”이라고 분노하지만 그때 뿐이다. 단 한번도 주먹을 불끈 쥐고 격투하는 자의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삶 자체가 깃털처럼 가볍기만 하다. 요즘 젊은이상과 겹쳐진다. 절벽 같은 취업전선에 있으면서도 몸과 마음은 여전히 빈둥거리는 것이 흡사하다. 풍요 속에서 ‘박 터지게’ 뭔가를 해본 적이 없는 그는 승부에 목을 매 이룰 목표가 없는 것이다.

긴박한 현실과는 거리가 먼 가나코는 쉽게 얻을 수 있는 두 개의 통풍구로 자신을 위로한다. 만화와 일흔 살로 보이는 할아버지와의 연애. 고난의 삶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대신 살짝 비껴가겠다는 속내가 담겼다. 현실에서 치이는 고달픔을 키다리 아저씨 같은 할아버지 품에서 쉬고 싶다는 뜻이다. 다행히 약삭빠른 계산 대신 진정성이 담긴 사랑이다.

이 책은 처음으로 사회 문턱을 넘어서야 하는 긴장감,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슬픔 등 크고 작은 삶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가나코는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지 않는다. 그냥 눈을 감아버리면 그 뿐이다. 언뜻 보면 가나코의 내면은 미처 폭발하지 못한 불발탄의 느낌이 날 수 있다.

작가는 무기력해 보이는 삶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보다 풍족하게 자란 세대의 무기력한 초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담담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격투하는 자에게 동그라미를 그려주고 싶은 것이 또 하나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가나코의 삶이 담담한지, 참을 수 없이 가벼운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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