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기자의헬로파워맨] "진짜 어른들 사랑 연기하니 마치 결혼을 해본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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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정(27)은 이제 그녀의 ‘소녀시대’와 결별하려 하는 듯했다. 개인적으로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그녀의 선택이니까. 또 서른을 앞둔 자연인 임수정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산골 요양원에서 만난 ‘나쁜 남자’(황정민)와의 잔인한 사랑을 그린 ‘행복’은 그에게 일종의 성인식 같은 영화다. 허진호 감독은 아예 “저, 생각보다 나이 많아요”라는 대사를 주었다. 임수정은 “청춘 로맨스가 아니라 진짜 어른들의 사랑을 연기하니 절로 성숙해진 기분, 결혼을 해본 기분마저 든다”고 했다.

앳된 얼굴에 작은 체구. 인생의 비극을 너무 일찍 알아버려 늘 죽음·상처·불행과 함께했지만 결국은 세상을 끌어안는 성숙한 소녀를 연기해 왔던 그다. 입양아와의 슬픈 사랑을 그린 KBS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미사’),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여고생으로 나온 ‘ing’ 등이 그랬다.

그는 롤리타 콤플렉스(미성숙한 소녀에 대해 정서적 동경이나 성적 집착을 가지는 현상)나 ‘소녀애’의 대상으로 소비되지도 않았다. 임수정의 소녀는 어리지만 누군가의 대상이 아닌 주체였고, 근원적 치유력을 가진 구원자였다. 거식증 환자로 나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싸이보그’)는 어떤가. 30kg대 깡마른 몸매로 좌충우돌하는 초현실적 소녀는 임수정 아니고서는 불가능했고, 박찬욱 감독 역시 혀를 내둘렀다.

‘행복’(3일 개봉)은 심은하(‘8월의 크리스마스’), 이영애(‘봄날은 간다’), 손예진(‘외출’) 등 당대 최고 미녀 배우들과 작업해온 허진호 감독의 새 영화다.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했던 이영애 대신 ‘몸빼’ 차림의 폐농양 환자 임수정은 “같이 살래요”라고 말한다. 물론 그 다음 사랑은 변하고, 연인들은 고통 받는다.

“이제 배우 인생의 1막을 마친 듯하다”는 임수정은 또랑또랑한 말투로, 모든 질문에 정답을 내고 말겠다는 듯 답했다. 앳된 외모 한 켠에 숨어있는 강단과 뚝심이 비쳐졌다. 가끔씩 터지는 중저음의 ‘으흐흐’ 소리가 듣기 좋았다.

#‘싸이보그’에서 ‘행복’으로

“‘싸이보그’를 끝내고 1주일 만에 촬영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영수(황정민)의 영화’라고 생각했다. 은희는 영수의 삶 속에 짧지만 강하게 스쳤던 여인. 작은 비중이지만 도전의식이 발동했다. 물론 ‘싸이보그’의 영군에서 사랑을 위해 투신하는 은희로의 변신은 쉽지 않았다. 머릿속에 정답이 있는 박찬욱 감독과 모든 것을 열어 놓는 허진호 감독의 스타일도 큰 차이였다. 자유를 만끽하며 발산하는 영군을 하다, 짜인 틀 안의 은희를 연기하려니 답답하기도 했다.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을 놓자 비로소 은희가 잡혔다. ‘싸이보그’처럼 모든 것을 자유롭게 창조하는 연기 못잖게, 틀 안에서 잘 해내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걸 절감했다. 사실 이런 게 연기의 묘미다. 한 작품 하고 나름대로 충만감에 찼는데 곧 예상치 못한 한계점에 부닥쳤다. 그래서 연기는 늘 도전이다. 매번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끌어내준다는 점에서는 나의 확장이기도 하다. 데뷔 초 폐쇄적이고 우울한 모습이 원래 나라면 이후의 모습들은 연기를 통해 발견된 새로운 나다. 예전보다는 많이 밝아졌다. 안 그런가. 으흐흐.”

#‘행복’, 임수정의 ‘숙녀시대’

“자연인 임수정은 나이 들어 가는데 배우 임수정은 소녀에 머물러 있었다. 동안인 덕에 ‘미사’ ‘싸이보그’ 같은 좋은 작품을 할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소녀일 수는 없잖나. 20대 후반인 자연인 임수정의 감성을 투영할 수 있어 택한 영화가 ‘행복’이다. 물론 은희가 남자들의 로망과 판타지를 담은 고전적 여성이라 이해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나중엔 모든 여자 안에 있는 모성성을 생각하며 연기했다. 그러고 보면 은희는 내 또래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성숙하고 성스럽다. 내가 맡는 배역들은 늘 그렇다. 극중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캐스팅 초기 ‘삼촌·조카 같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던 황정민·임수정의 연인 조합은 더할 수 없이 어울린다. 오히려 임수정이 훨씬 어른스럽고 엄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황정민은 “임수정에게는 사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근사한 느낌이 있더라”며 “그건 배우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느낌인데, 그것만으로도 좋은 배우”라고 말했다.)

# 현장의 ‘행복’

“황정민은 같이 연기하고 싶었던 배우였다. 호흡 맞추면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배우끼리의 예감이 적중했다. 현장에서의 존재감만으로도 상대에게 영향을 주는 대단한 배우다. 카메라가 안 돌아가도 오빠만 바라보면 눈물이 절로 나왔다. 후반부에는 촬영장 밖에서도, 나는 오빠를 바라보고 오빠는 나를 피하는 장면이 계속 연출됐다.”

“허진호 감독은 결말을 포함해 모든 것을 열어둔다. 영수와 은희가 처음 만나서 가게 앞 평상에 앉는 장면도 대본에는 그저 ‘바라본다, 앉는다’ 이렇게 돼 있다. 현장에서 배우와 상의하며 대사, 디테일을 만드는 거다. 감정도 최저·중간·최고치, 여러 버전을 찍으니 컷당 15~20테이크(회)를 간다. 힘은 들지만 현장에서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표현할 수 있으니 배우로서는 좋다. 여배우로서는 가장 꾸미지 않은 모습으로 가장 예쁘게 찍어주는 감독님이다. 보통 때도 어떻게 하면 여배우가 예쁠까, 늘 관찰하신다.”

#‘행복’ 이후

“지난해 ‘각설탕’ ‘싸이보그’ ‘행복’까지 세 편을 찍었다. 그것도 전작 끝내고 1주일 만에 다음 작품에 들어갔다. 너무 달린 거다. 이제는 나답게 다시 느리게 걸을 생각이다. 앞으론 좀 더 흐트러진 연기, 정형화되지 않은 연기를 하고 싶다. 송강호·류승범·공효진 같은 배우처럼 말이다. ‘싸이보그’에선 작품이 워낙 비현실적으로 튀니까 연기 자체로는 미진한 대목이 있고, ‘각설탕’ 역시 스포츠 영화라는 장르의 한계가 컸다. ‘행복’으로 배우 인생 1막은 끝난 느낌이고, 서른 살의 성장통과 함께 열릴 2막은 나조차 궁금하다. 배우로서 마음에 두는 말은 진실성이다. ‘입으로 대사하고, 눈으로 울고, 몸으로 움직이지만, 표현은 마음으로 진실되게 한다’는 거다. 닮고 싶은 배우의 삶은 말년의 오드리 헵번. 연기 스타일 면에서는 나만의 길을 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 ‘임수정류’ ‘임수정 스타일’의 창조랄까. 욕심이 과한가. 으흐흐.”

글=양성희 기자 <shyang@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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