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은 ‘습습한 맨드리’요, 여성은 ‘결곡한 맨드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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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시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는 걸음걸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세세한 연출법이 무궁무진한 맵시, 그 대강의 명칭만 해도 수 백 가지에 달한다.
‘맵시가 곱던지 추하던지, 둘 중 하나겠지 어떻게 수 백 가지나 될까?’ 걷기의 미학에 둔감해진 현대인이라면 능히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선조들은 달랐다. 현대인은 맵시라는 말을 대게 젊거나 고운 여성을 수식할 때 쓰고 있지만 옛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의 맵시를 구체적인 안목으로 구분해서 사용했다. 그들의 시각은 노련하고도 다채로웠는데 때로는 문학적이기까지 했다. 어린 아이 하나만 놓고 볼 때도 그저 ‘귀엽다’ 하는 정도의 묘사는 쳐주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작은 신을 신고 또박또박 걷는 아이에게는 ‘들메양(樣)’이 참으로 바르다하여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처신이 방정함을 뜻했고, 반대로 나이가 들어도 칠칠치 못했을 때는 ‘배냇양’이 보기에 흉하다고 혀를 찼다. 그 밖에도 미운 일곱 살배기의 산만하게 걷는 모양새는 ‘가살스러운 맵시’라 해서 회초리로 다스렸으며, 똘똘한 아이의 걷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놈 참 개맹이새 보기 좋구나’ 하고 칭찬했다. 나이가 어려 천방지축으로 날 뛰는 아이들은 맨드리(맵시)가 직수굿해질 때까지 서당에 내보내기도 했는데 행실이 발라지기는커녕 요변 부리는 법만 배워온 아이들에겐 걷는 폼이 ‘좁쌀여우’ 같다며 꾸짖었다.
이와 같이 맵시의 미추를 결정하는 기준은 옷의 좋고 나쁨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풍겨나는 분위기에 의해 결정됐다. 형편이 몹시 궁색하여 누더기를 입고 있더라도 그 품성이 맑고 몸가짐이 단정하면 ‘뜯게(너무 낡아서 더 이상 입을 수 없는 옷)모양새라도 그 맵시가 참 단아하다’고 표현했으니 선조들의 정신이 어떠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으리라. 아무튼 이런 식으로 수 천 수 만 가지의 맵시가 있을진 데, 그 중 최고로 치는 맵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남성들 사이에서 최고로 여겼던 맵시는 ‘습습한 맨드리’라 하여 의복을 단정하게 갖추고 사내답게 걷는 것을 뜻한다. 시선 처리 또한 중요했는데, 절제 있고 너그러운 눈매는 덕목 있는 사내들의 기본 소양이었다. 이처럼 걷는 모양새가 곧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하는 것이라 ‘양반은 비가와도 뛰지 않는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반상의 구분이 있던 시절에는 걸음걸이는 물론 그 어떤 스타일이라도 아랫사람이 상전을 앞지르는 행위가 허용되지 않았다. 사극 속에서 고증되는 옛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보면 어느 정도 상상이 가는데, 특히 갈치 꼬랑지 같은 수염을 달고 ‘사또~ 예이~’를 입에 달고 사는 이방의 뱁새 걸음을 보면 느낌이 확 온다.
여성의 맵시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결곡한 맨드리’라 하여 마음씨와 몸가짐이 반듯하고 걷는 모양새나 행동 또한 빈틈이 없음을 가리킨다. 화장을 하지 않은 민낯으로 겨끔내기 친구와 시간을 보내던 천진한 시절을 마감하고, 호롱불에 수를 놓으며 신부수업 하는 시기를 떠올리면 되는데, 이를 두고 생에 단 한 번 뿐인 ‘꽃맨드리’ 시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경우 역시 아랫사람이 상전보다 보폭이 큰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특별한 용무가 있을 시에만 상전의 명령이 떨어지면 눈치껏 앞질러야 했는데 그 또한 종종걸음을 쳐야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일부 청렴결백했던 선조들에게는 반상의 구분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날 최고의 문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추사 김정희는 반나절 이상을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스스로를 ‘침묵 안에서 걷고 있다’고 번뇌했다. 그 절개 깊은 선비가 자신보다 더 고귀한 걸음걸이를 가졌다고 치하한 사람은 신분도 이름도 없는 일개 심부름꾼이었다. 자신의 서신을 정성껏 날라주는 그 하인의 조각걸음이 추사의 마음에 큰 감복을 주었던 것이다.

그저 패션과 다이어트에만 신경 쓰면 자연히 해결될 줄 알았던 맵시의 세계. 그 내막을 알고 보니 겉으로 보이는 모습 못지않게 내적인 수양 또한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최고의 맵시를 결정하는 가장 진실한 요소는 걷는 자의 인격이요 마음이다.
반상구분이 있던 시절의 개똥이는 좀 더 우아하게 걷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고 더욱 예쁘고 고요한 눈빛을 하고 싶어도 상전의 눈치를 봐야했다. 족벌로 구분되는 신분 제도가 없어진 이제 와서는 돈이 그것을 대신한다는 쓴 소리가 나돌지만, 인격을 닦아 그에 맞는 걸음걸이를 갖추는 데는 돈이 한 푼도 들지 않는다. 곰곰 생각해보면 원하는 만큼 인격수양을 할 수 있는 현실은 내가 가진 재산이자 기회다. 걸음걸이가 곧 내 인격이라는 생각으로 길을 한 번 걸어보자. 맵시가 좀 달라지지 않겠는가?

설은영 객원기자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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