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공무원들의 「허심탄회」(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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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김영삼 개혁이 시작되면서 공무원 사회는 개혁 저항세력이 되리란 예측이 있었다. 실제로 지난 1년간 복지부동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공무원들의 소극적·방어적 근무자세가 이런 예측을 현실화시키고 있다. 과거 한국의 발전과 성장을 주도한 공무원들의 적극적·창의적 근무자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비판을 들었다. 물론 민간분야의 비약적 발전이 더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강도높은 사정작업이 심리적 위축을 가져온 점도 그 원인이 된다. 그렇더라도 최근 공무원들의 무기력은 보기에 너무 민망한 것이 사실이다.
공무원들의 이런 풀죽은 위상을 불식할 수 있는 자그마한 사건이 지난 4일 3급이상 고급공무원들의 간담회에서 일어났다. 경제부처를 중심으로 모인 1백60명의 간부 공무원들이 허심탄회한 정책토론회를 벌인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경제정책에 대한 범부처적인 이해증진을 위해서로 흉금을 털어 놨다고 한다. 또 보다 나은 대안마련을 위해 공무원사회의 부정적 요소들에 대해 기탄없는 비판도 있었다고 한다.
가령 과거에는 부정부패가 공직사회의 인센티브가 됐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자성론,우리 농업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자신감,세계무역기구(WTO) 체제는 새로운 경제 제국주의로 이에 대비하는 길은 경쟁력 향상 뿐이라는 유비무환론 등이 토로된 것이 바로 토론회의 분위기와 성격을 드러내 준다.
결롬부터 말하면 이런 식의 토론은 진즉 있었어야 했다. 아울러 그 자리에서 거론된 문제들은 일과성행사로 그치지 말고 제도와 법령,그리고 정책에 반영돼야 한다. 또 그날의 혁신지향적 분위기는 평소의 근무자세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고급 공무원들의 브레인스토밍적 정책토론이 말의 성찬에 그치지 않고 국정에 실질적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급 공무원들의 정책토론회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모두가 당연하고,또 절실한 해결책을 갈구하는 문제들이다. 특히 신랄한 비판과 문제제기가 주로 차관들의 입을 통해 토로됐다는데서 앞으로의 국정수행에 기대를 갖게 한다. 만약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공무원 사회의 일하는 분위기가 일신되고,국정방향이 오락가락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처럼 다행스런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 공무원들은 복지부동이라는 말로 힐책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재미 좋았던 옛날만 생각한다느니,규제와 간섭에 대한 미련을 못버린다느니 등의 부정적 평가를 많이 듣고 있다.
이제 공무원사회는 이런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문민시대에서의 진정 바람직한 공무원의 위상을 확립해야 한다. 이 길이 동시대를 사는 우리 공무원들의 명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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