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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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나는 방의 불을 끄기 전에 대문 열쇠를 챙겨 넣고,살며시 집을 나섰다.
스포츠센터 정문앞 계단에 앉아서 5분쯤 있으니까 까만 그랜저가 와서 멎었다.차창유리가 스르르 열리는데 운전석에 앉은 동우가 소리쳤다.
『야 타!』 『…그럼 재밌는 데 데리고 갈 거예요?』 내가 술취한 계집애 흉내를 내면서 차에 오르자 동우가 『와이 낫?』그러면서 킬킬거렸다.
동우가 텅 빈 강변대로를 달리면서 음악의 볼륨을 잔뜩 높였다.마이클 볼튼의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였다.
『이건 리바이벌인데…옛날 거가 더 좋아.』 난 사실 옛날 게어떤 건지도 몰랐지만 형에게 들은대로 지껄이면서 아는척을 해댔다.동우에게 꿀리고 싶지가 않아서였다.동우가 노랫소리 때문에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소리쳤다.뭐라구…? 『이거 좀 소릴 죽여봐.』 동우가 뭔지를 눌러서 노랫소리를 죽이곤 또 말했다.
뭐라구…? 『이 노랜 옛날 게 더 좋다구.마이클 볼튼은 우수가없어.』 동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않고 내 말을 씹었다.그러면서 눈썹을 한번 들썩 했는데,그건 아쭈 제법인데 하는 표정이었다.나는 더 말하다가는 뽀록이 날 것 같아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그래서 한동안은 마이클 볼튼이 악쓰는 소리만이 들렸다 .
『재미보다가 걸려서 혼나고 있다며.애들이 하는 이야길 들었어.』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지 뭐.내일이면 정학도 끝이야.』나는 대수롭지 않다는듯이 굴었다.동우에게 꿀리고 싶지 않았다.
동우가 씨익 웃었다.그렇다고 내가 기분 나쁜 그런 웃음은 아니었다. 동우는 미국에서 살다가 1학년 2학기 때 전학왔는데 중학교부터 미국에서 다니다가 온 거라고 했다.나이는 보통 애들보다 두 살이나 위여서 학교밖에서는 대학생들 하고만 논다고 쫘악소문이 나 있었다.
학교에서의 동우는 애들하고 잘 어울리지 않았다.주로 혼자서 겉돌았는데 아이들이 동우를 따돌렸는지 그 반대인지는 애매모호했다.나는 언젠가 형 방에 있던 시집에서,만 명의 주한미군에게 사천만이 소외당하고 있다고 쓴 시를 본 적이 있었 다.
선생님들도 동우에게는 꽤나 관대한 편이었다.동우는 조퇴나 결석을 밥먹듯이 해댔지만 우리는 동우가 야단맞거나 벌 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동우는 신사동으로 해서 방배동과 압구정동과 청담동의 거리 거리를 천천히 차를 몰면서 내게 구경시켜주었다.불빛들이 요란찬란했고 짧은 치마의 계집애들과 야구모자를 쓴 사내놈들이 여기저기서 히히덕대는 게 보였다.
『우리도 「야타」이거나 해볼까.』 『아냐,그러지 마.그러다가정말 타면 어쩔라구….』 동우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강변의 고수부지였다.새벽 1시가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우리는 간이매점에서 캔맥주를 사들고 둑에 나란히 앉았다.발 아래로강물이 찰랑거렸고 강물 위에서 달빛이 덩달아 반짝였다.
『너 내가 왜 갑자기 한국에 돌아왔는지 모르지?』 동우가 동우답지 않게 침통한 목소리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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