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전문가 뚜버기의 주관적이고도 사소한 이야기 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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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이 소시민에게 미치는 사회적 비용 고찰

전문가란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고 모 포털 국어사전에 정의돼 있다. 말뜻으로만 보면 스스로 전문가라고 말하기에는 쑥스러울지 몰라도 앞에 ‘준(準)’을 더해 ‘준전문가’라고 부르기엔 부끄럼 없을 듯하다. 먹고 살기 위해 걸어서 출근하며, 걷기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가졌으니 이제 ‘걷기전문가’라는 권위를 가지고 위엄 있게 칼럼을 풀어내어 볼까?

‘개학’시점이 되면 각종 포털에서는 ‘초딩의 습격’이란 유행어가 나돈다. 방학 끝 무렵 방학숙제를 남의 도움(웹 2.0의 문화에서는 이를 집단지성이라 부른다)을 받아 해결하고자 하는 초등학생들의 질문이 포털을 도배하기 때문이다. 걷기界에도 역시 ‘개학’이 미치는 영향이 있다. 필자와 같은 소시민에게는 득(得)보다는 해(害)에 가까우니 ‘사회적 비용’이라는 거창한 말을 써보려 한다.

먼저, 길이 갖는 사회성을 언급하자면, 시인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에 등장하는 버나드 비숍 여사의 목격담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世界로 화하는 劇的인 서울을 보았다’라는 한 대목이 떠오른다. 길은 그대로일진데 시간에 따라 그 길을 사용하는 사회 주체가 달라진다는 내용인데, 비숍여사가 1893년에 본 사건은 지금의 서울도 동일하다.
새벽녘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부지런한 이들이다. 일부 꼭지까지 취해서 뒤늦게 집을 찾아 들어가는 취객들을 빼면 그들은 바지런히 몸을 움직이며 살아간다. 그 뒤를 이어서 유령 같은 몰골의 고등학생들이 한껏 심각한 표정으로 등장하고 이후 이 나라 ‘유리지갑’의 소유자들이 꼬리를 문다. 성실히 세금을 내면서도 대우를 받지 못하는(필자가 속한) 소시민 그룹이 헐레벌떡 거리를 종종 거리며 달리듯 걷는다. 그리고 오전 8시는 중학생들의 시간. 아이들의 로망인 <뽀뽀뽀>를 보고 엉덩이를 떼기에는 머리가 굵은 무렵의 아이들이 길을 활보한다. 이어서 등장하는 귀여운 녀석들. 뽀얀 솜털 가득히 부스스한 머리로 혀 짧게 새가 우짖듯 재잘대는 초등학생들은 바퀴달린 가방을 끌거나 울긋불긋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한다. 세상이 마냥 아름답게 보이는 배부른 고민의 대학생들과 부유한 아주머니들은 ‘제 멋대로’ 등장했다 사라지곤 한다.

이제 길을 점유하는 시간대와 그 집단들이 대충 머릿속에 인식되었다면, 왜 개학이 소시민의 사회적 비용을 높이는지 본격적으로 고찰해 보자.
방학은 일종의 휴전 기간이다. 유리지갑族에게 전철과 버스에서의 자리는 하루를 상큼하게 시작 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자 무비용에 가까운 유희다. 그런데 휴전이 끝나면 ‘적(敵)’들이 대거 나타난다. 오, 신이시여! 분명히 내 자리였는데. 한 녀석도 아니고 두 녀석 세 녀석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 타인에 의해 서 있어야 하는 다리에 미치는 모든 하중의 집합이 바로 사회적 비용의 한 갈래이다.
자리뿐일까? 전철역 입구에서 ‘가져가주세요’라며 기다리던 무가지들 역시 거리의 먹거리를 홀라당 먹어버리는 비둘기처럼 학생들이 죄 가져가 버린다. 무가지도 없이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은 이차적인 氣싸움을 벌여야 한다. ‘어이구 힘들어... 어디 자리 없나? 어라! 저기...저기.. 내 자리인데...’ 이로 인해 소진되는 체력적 정신적 에너지의 합이 사회적 비용의 두 번째 갈래가 된다. 오오~ 고단한 나의 출근길이여.
자, 그래도 삶은 계속 돼야 하나니, 살 길을 찾아야 한다. 지금 자리가 없어다면 누구 앞에 서 있어야 할까? 빙고! 학생들 앞에 서있어야 한다. 그들은 지역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내게 자리를 양보해 줄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학군제를 시행하는 교육부에 감사함을 표하게 된다.

출퇴근으로 대중교통과 두 다리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걷기전문가들에게 ‘사회적 비용’은 이처럼 아주 커다랗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소시민 대부분의 삶일 뿐, 학식 높은 어떤 분들도 이런 심리적·육체적 경제비용을 심각하게 계산해보지는 않았을 터. 그러기에 자칭 걷기전문가인 필자가 한번 위엄 있게 제기해봤지만 나 역시 ‘피식’ 웃어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그 적(敵)들이란 내게 ‘삼촌’이라 부르며 반갑게 달려드는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녀석들 역시 나와 같이 삶의 무게를 버텨내는 튼튼한 두 다리로 학교를 다니지 않는가.
결국 그 적들이나 우리들이나 열려있는 길을 같이 걷고 있는 ‘동지(同志)’들인 셈이다. 자신만의 편안한 城(자가용)에 거주하는 것보다,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느낄 수 있는 삶이 더 풍성하다는 것을 공유하고 있는 길벗들. 비록 개학 때마다 자리다툼으로 인한 치열한 쟁탈전은 되풀이될지언정 말이다.

뚜버기 프리랜서

※ ‘걷기전문가’임을 자처하는 필자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신념으로 멀쩡한 본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오프 칼럼니스트로서의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인터넷시대의 소시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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