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열전>11.내가 겪은 장예준장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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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張禮準 前장관이 상공부장관이던 4년동안 본인은 수출입을 맡는商易차관보로서 도왔고 그전에 경제기획원에서도 상사로 모셔 제법오랫 동안 함께 보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張장관에 대한 인상은 흔히 말하는强靭性에 치우친 것도 아니고 유연성에 기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두드러지지 않은 성격은 공직을 원활하게 수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張장관이 상공부에서 이룩한 일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역시 70년대의 중화학공업 기반조성과 수출 1백억달러 달성이다.
龜尾 공업단지의 전자산업과 울산의 석유화학단지및 포항의 철강단지 조성은 부족한 外資조달과 內資동원이 사업성공의 관건이었고, 이를 이룩한 장본인이 張장관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지금도 일부에서는 그가 중화학공업의 육성에만 정책의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경공업 부문,특히 당시 우리 산업의 꽃이었던 섬유산업을 경시해 사양산업의 길을 걷게 했다고 주장하는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한 張장관은 섬유산업이 우리나라에서 사양화됐다고 언급한 일도,생각한 일도 없었다.
단지 70년대 중반까지 우리가 국내에서 동원할 수 있었던 內資의 상당부분이 그동안 섬유업으로 돈을 번 기업인에게 있었으므로 이를 중화학공업 부문으로 유도하기위해 다른 업종으로의 轉業을 강력히 권유한데서 「오해」가 생긴 것같다.
지금 우리나라의 수출 주종품은 첫째가 전자.전기제품이고 둘째가 섬유류다.철강제품과 석유화학제품,그리고 자동차.선박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 성과의 적잖은 부분이 70년대에 張장관이 이끌던 상공부 산업정책에서 비롯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경제에서 수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것이어서 우리는 64년 1억달러의 수출을 하고 이날 즉,11월30일을 「수출의 날」로 삼아 매년 행사를 갖고 있다.
지난 60,70년대의 國是는 「1백억달러 수출」이고 「1천달러 소득」이었다.
그 1백억달러 수출이 張장관이 상공부를 떠나 동력자원부장관으로 부임하던 77년12월에 이루어졌다.
그해 수출의 날 행사는 종래와 달리 장충체육관에서 朴正熙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적인 기념식으로 치러졌다.
본인이 商易차관보로서 사회를 맡았던 이 행사에서 대통령 옆에張 前장관과 후임인 崔珏圭장관 두 사람이 함께 배석해 감격해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게다가 기념식후 저녁식사가 張장관 특유의 호기와 酒力 때문에길어져 그때 수출업무를 전담했던 직원 몇명이 야간통행금지에 걸려 귀가에 어려움을 겪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상하간에 끈끈한인간관계를 갖고 수출에 매달렸던 것이 당시의 상공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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