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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하라! 당신 인생이 성공으로 열릴 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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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그림=김태헌

이번엔 내가 도망자다. 입 안에서는 달짝지근한 단내가 풍기고 옆구리가 쑤시기 시작한다. 같이 도망치던 달봉이 형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어딘가 으슥한 담장 밑에 숨어있을 것이다. 숨어있다 잡히면 벌금이 더블이 된다. 난 숨지 않을 것이다. 벌금을 더블로 내고 싶지도 않고 정해진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까닭이다. 시계를 보니 대략 20분 정도 남은 것 같다.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누른다. 팽팽해진 복근이 옆구리에서도 느껴진다.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가끔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해야 하나 회의감도 들지만 이렇게 복근이 느껴질 때면 회의감도 고통도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사라진다. 시야에 붉게 충혈된 교회의 십자가가 들어온다.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도망쳐야겠다.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에 A가 떠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A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철수.”

 나는 뛰던 것을 멈추고 집결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욱신거리던 옆구리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한다.

 
 집결지엔 ‘가’, ‘나’, ‘다’와 나 그리고 A밖에 없었다. 달봉이 형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먼저 도착한 ‘가’, ‘나’, ‘다’가 제각각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A가 시계에 가 있던 시선을 거두고 나를 보았다. 쏘아보는 듯한 그 눈빛을 매번 마주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움찔 놀라곤 한다.

 “C는 왜 연락되지 않습니까?”

 ‘가’, ‘나’, ‘다’가 스트레칭을 하며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나는 괜히 무안해져 이마의 땀을 소매로 훔쳐냈다. A가 눈짓으로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같이 도망치다가 중간에 헤어졌습니다. 저도 C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A가 ‘가’, ‘나’, ‘다’를 손짓으로 불러 모았다. ‘가’, ‘나’, ‘다’가 A앞으로 가 섰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아직 C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전달사항을 여러분에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우리가 모일 곳은 시대 본사 앞입니다. 시간은 오늘과 같습니다. 자 그럼, 내일 뵙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A가 계단을 내려와 골목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 ‘나’, ‘다’도 제각기 골목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A가 서있던 계단에 걸터앉아 달봉이 형을 기다렸다. 이 클럽 안에서 A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가’, ‘나’, ‘다’와 얘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지만 그들 역시 A에 대해 잘 모르는 눈치였다. 이 클럽 안에서 말할 수 있는 자는 A밖에 없었다. 오로지 그가 짠 시뮬레이션 속에서 우리의 클럽활동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었다. 클럽의 규칙 중 하나가 서로 간의 의사소통 금지다. 그러므로 서로의 본명은 물론,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매일 밤 서로가 서로를 쫓고 쫓기는 입장이 되어 뛰어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달봉이 형과 대화를 나눈 것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었다. 만약 이 비밀이 A의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우린 당장 클럽을 나와야만 했다. ‘다’의 따귀를 때렸을 때, 난 정말 클럽을 나오고 싶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때린다는 것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다’의 따귀를 때리고 도망치던 나는 골목을 돌다 쓰레기봉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뒤쫓아 오던 ‘다’는 쓰러져 있던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다’가 내민 손을 잡으려고 했다. 내가 손을 내밀어 ‘다’의 손을 잡으려던 그 순간, ‘다’는 내밀었던 손을 뒤로 물리더니 사정없이 나의 따귀를 후려쳤다. 후끈한 열기가 볼을 타고 발가락 끝까지 내려갔다. 두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잠시 나를 노려보던 ‘다’는 몸을 돌려 집결지를 향해 걸어갔다. 나는 잡힌 죄로 만 원의 벌금을 A에게 내야만 했다. 만 원을 건네받은 A는 오천 원을 거슬러 ‘다’에게 건넸다. 달봉이 형도 ‘나’에게 따귀를 맞았는지 왼쪽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A에게 오천 원을 건네 받을 때 ‘다’가 지어보였던 그 미소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클럽을 진작에 탈퇴하지 않았던 이유가 아마도 그 미소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달봉이 형이 내 어깨를 툭 치며 옆에 앉았다. 얼굴을 뒤덮은 땀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유난히 번질거렸다.

 “다들 갔구나. 휴, ‘가’씨와 ‘나’씨가 얼마나 무섭게 쫓아오던지…….”

 얼굴의 땀을 훔치던 손수건이 푹 젖어있었다.

 “어디 숨어있었어?”

 달봉이 형의 두 동공이 활짝 열리는 것이 보였다. 손사래를 크게 치며 내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가로챘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숨을 사람으로 보이냐?”

 달봉이 형은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곧, 나는 지금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라고 밝히는 것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일어났다. 엉덩이에 묻은 먼지들을 손바닥으로 툭툭 털어냈다. 땀에 절은 팬티가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와 달봉이 형은 집이 같았다. 달봉이 형은 내가 세들어 살고 있던 주인집 아들이었다. 클럽에 나오기 전에 계단에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런 대화도 섞어 본 적이 없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달봉이 형이었다. 각각 만원씩 벌금 내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저기, 3층 옥탑에 사는 학생 맞죠?”

 계면쩍은 듯 뒤통수를 슬슬 긁으며 달봉이 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 예. 2층 주인집……”이라고 대답했다. 달봉이 형은 나보다 4살 많았다. 대학 졸업 후에도 취직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 창문으로 주인아저씨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러냐? 정 할 게 없으면 가게 나와서 쌀이나 날라 이놈아.”

 다이어트 이유에 대해 발표했던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달봉이 형이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하하, 자유롭게 나 하고 싶은 것 하며 살기 위해 준비 중이야. 하늘을 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위한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그 ‘자유롭게 나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끝내 말하지 않았지만 준비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새벽에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거친 숨소리나 열띤 관중들의 함성소리로 달봉이 형의 주된 일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사실을 달봉이 형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프라이버시는 존중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마땅히라기보다는 괜히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 좀 더 솔직한 내 생각이었다.

 “곧 복학이지?”

 달봉이 형이 물었다. 나는 달봉이 형의 어깨를 툭 치고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가로등 불빛 밑에 다다라 아직 뒤처져 오고 있는 달봉이 형에게 외쳤다.

 “맥주 한 캔 어때?”

 그제야 달봉이 형의 느린 발걸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패밀리마트 앞 파라솔에는 취객 몇이 맥주를 마시며 혀 꼬부라진 소리로 그들만의 이야기 속에 빠져 있었다. 달봉이 형은 그들과 멀찌가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알바생에게 땀에 절은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미는 것이 좀 무안했다. 내가 계산을 하려고 하자 달봉이 형이 앞을 가로막았다.

 “짜식. 이건 내 몫이야.”

 달봉이 형은 계산대 위에 이천이백 원을 내려놓았다. 나는 달봉이 형의 복부에 살짝 주먹을 들이밀었다. 으윽, 괜스레 오버액션을 취하던 달봉이 형이 내 맥주 캔까지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이천이백 원을 주머니에 넣고 만원으로 계산했다. 거스름돈을 받고 밖으로 나오자 맥주 캔을 따고 기다리던 달봉이 형이 짠하고 소리쳤다.

 “벌금 안 내서 기분 좋다. 안 그러냐?”

 나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도시를 에워쌌다. 땀에 절은 몸에서 쉰내가 스멀스멀 기어 콧구멍 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코를 한번 슥 훔쳤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던 형의 시선은 문 닫은 새벽의 상점들을 훑고 있었다.

 “형이 취직되면 저기 영진수산에서 회 한번 쏠게.”

 “언제는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남을 거라며?”

 “자유로운 영혼은 이슬만 먹고 사냐?”

 “어디 봐둔 데라도 있어?”

 “알아보고 있는 중이시다.”

 달봉이 형은 남은 맥주를 고개를 젖혀 끝까지 다 마셔댔다. 목울대로 넘어가고 있는 맥주가 불쑥거리며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듯 보였다. 나도 남은 맥주를 마저 다 마셔버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한 후 잠 속으로 풍덩 빠져들고 싶었다. 하지만 며칠 후에 있을 토익 시험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몸이 축 늘어졌다. 달봉이 형은 그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길 건너 영진수산 간판을 바라봤다. 바다 속 물고기들이 떼 지어 어디론가 헤엄쳐 가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가 닿은 곳엔 그들보다 세 배 이상 커 보이는 육중한 도미 한 마리가 간판 밖 세상을 향해 튀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나는 상체를 좌우로 흔들며 일어섰다. 졸고 있던 달봉이 형을 깨웠다. 아침은 골목길을 따라 아청빛 무리를 이끌고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영진수산 간판이 내뿜는 빛을 받으며 집을 향해 걸어 나갔다.

 
 집결지엔 ‘가’, ‘나’, ‘다’와 달봉이 형 그리고 A가 먼저 와 있었다. A는 검은색 윈드재킷과 등산 바지 그리고 검은 모자를 쓰고 클럽원들이 제각각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봉이 형이 상체를 숙인 채 나를 바라보며 살짝 윙크를 했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A가 자신이 서 있는 화단 앞으로 우리를 불러 모았다. 모자 창 밑에서 번뜩이는 A의 날카로운 시선이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다. 처음 A를 만난 곳은 아현동 굴레방 다리 밑에서였다. 전봇대에 붙은 과외 전단지들 사이에 ‘다이어트 클럽’ 전단지가 반쯤 떨어진 채 바람에 휘청거리고 있었다. 나는 처음엔 휘트니스 클럽의 광고 전단인 줄로만 알았다. 무심코 지나칠 법도 한데, 한 글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었다.

 ‘다이어트는 당신을 성공으로 인도한다.’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다이어트를 하면 인생이 성공할 수 있다는 다소 궤변적인 주장이었다. 강습비도 없었고 무조건 만 원만 들고 오면 되는 것이었다. 당일의 성공 여부에 따라 만 원을 쓰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오천 원을 더 벌 수도 있다는 말에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면서 혹했다. 휴학 후 일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술과 잠으로 일관한 덕택에 뱃살이 늘어질 대로 늘어진 것도 내가 이 클럽에 가입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물오징어 다리처럼 흐늘거리는 전화번호 쪽지를 떼어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전화를 받은 것은 지금의 A였다. 건조한 목소리로 동네의 한 교회 앞으로 자정까지 나오라고만 했다.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나가 보니 여자 셋뿐이었다. 달봉이 형은 내가 클럽에 나오고 일주일 후에 들어왔다. 내가 간 날이 클럽이 처음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A는 나와 여자 셋을 내려다보며 짧은 연설을 했다.

우리를 쫓는 자들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는데 …

그림=김태헌

“다이어트는 여러분을 성공으로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나의 지시에 따라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나는 왠지 군대로 다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여자가 물었다.

 “그냥 달리는 거라면 전 빠지겠어요. 굳이 이 밤에 처음 보는 분들과 뛸 필요는 못 느끼겠네요.”

 여자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A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내 말 안 끝났소. 여러분은 각각 가, 나, 다, A, B, C로 불리게 됩니다. 편을 갈라 한 편은 도망을 치고 다른 한 편은 쫓아가는 겁니다. 내가 시뮬레이션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난 A라고 합니다.”

 나는 남성이므로 알파벳 대문자 ‘B’를 받게 되었다. 여자들은 각각 한글 자음 ‘가’, ‘나’, ‘다’를 부여받았다. 첫날의 시뮬레이션은 가위바위보였다. 첫날이라 가벼운 시뮬레이션을 제공한다는 A의 부연 설명과 함께 나와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가’가 한 편이 되었다. 내가 대표로 ‘다’라는 여자와 가위바위보를 했다. 내가 묵을 내고 ‘다’가 보자기를 내는 바람에 우리가 쫓는 쪽이 되었다. ‘나’와 ‘다’가 A의 신호와 함께 골목길로 사라졌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에 A가 어서 뛰어가 잡으라고 소리쳤다. 나와 ‘가’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주춤거렸다. 그러자 A가 우리 두 사람의 등을 후려쳤다. “어서 잡으란 말이야.” 우리는 채찍질을 당한 말처럼 ‘나’와 ‘다’가 들어간 골목길로 뛰어갔다. 수갈래 길로 나뉜 골목길 앞에서 우리는 잠시 망연해졌다. ‘가’가 골목길을 포기한 채 직선으로 뻗은 대로변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어차피 이 동네는 골목길이 다 연결되어 있어요. 그냥 뛰어요.” 나는 무언가 반박할 말을 찾으려고 했다. ‘가’는 벌써 골목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가’가 사라진 골목으로 뛰어갔다. 얼마 못 가 숨이 목까지 들어찼고 허벅지 근육이 팽팽히 조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잠시 쉬고 싶었다. 하지만 ‘가’는 계속 쫓아가자고 재촉했다. “보여야 쫓아갈 게 아닙니까?”

 내가 대꾸하자 ‘가’가 소리쳤다. “쫓다 보면 나오겠죠.”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그날 ‘나’와 ‘다’를 잡지 못했다. A는 나와 ‘가’에게 만원을 낼 것을 요구했다. ‘가’가 나를 노려보며 만원을 A에게 건넸다. A는 나와 ‘가’로부터 받은 이만 원을 우리 눈앞에 펼쳐보였다. 그러고는 ‘나’와 ‘다’에게 각각 오천 원씩 건네주었다.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장딴지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A가 말했다.

 “내일의 집결지도 여기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각자 다이어트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준비해 오십시오. 수고 많았습니다. 그럼.”
 말을 마친 A는 골목 어귀의 가로등 불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사라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매일 같이 찾아드는 잦은 꿈으로부터 해방된 달콤한 숙면이었다. 다음날 나는 다시 어제의 집결지로 갔다. A가 팔짱을 낀 채 계단 옆 화단에 앉아 있었다. ‘나’가 먼저 A가 어제 섰던 계단에 올라가 말을 꺼냈다.

 “저, 저는 단지 살을 빼기 위해 이 클럽에 가입했습니다.”

 ‘나’가 말을 다 마쳤는지 A쪽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듣고 있던 A가 ‘나’에게 물었다. “그게 이유의 전부입니까?” 달빛에 반사된 A의 인광이 ‘가’를 향해 번득였다. ‘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A가 일어나 ‘나’의 옆에 섰다. 그러고는 ‘나’에게 소리쳤다. A의 목소리가 밤 공기를 갈랐다. “그게 이유의 전부 맞습니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래 위로 살짝 흔들었다. A가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나’의 몸이 조금씩 들썩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 살을 빼서 면접관님들한테…….”

 채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A가 말을 가로챘다.

 “바로 그겁니다. 진실된 이유를 말했어야죠. 당신은 분명 다이어트에 성공할 겁니다. 자, 다음 분.”

 ‘나’가 내려가자 ‘가’가 올라왔다. ‘가’의 주먹이 불끈 쥐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어젯밤 벌금을 낼 때 ‘가’의 쏘아보는 듯한 눈빛을 기억했다. ‘가’의 말이 시작됐다.

 “반드시, 반드시 살을 빼서 인성 씨의 마음을 되돌려 놓을 겁니다. 그 여우같은 계집애로부터 인성 씨를 구해낼 겁니다.”

 ‘가’는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불끈 쥔 두 주먹이 허공을 몇 차례 갈랐다. A가 박수를 치며 ‘다’에게 올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다’는 사뿐히 계단에 오르더니 우리를 한번 휘 돌아보았다.

 “두 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저 역시 앞서 말씀하신 두 분과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몸은 이제 무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무기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아름답고 날카로운 무기를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다. 파이팅!”

 나도 모르게 파이팅을 같이 외치고 있었다. 다행히 격앙된 ‘나’와 ‘가’ 역시 ‘다’의 말에 공감했는지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가’는 연거푸 두 번씩이나 외쳐댔다. 이해되지 못하는 점은 모두들 날씬하다는 사실이었다. 굳이 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다’는 오히려 나무젓가락이 연상될 정도였다. 의구심을 가진 채 세 여성들을 둘러보던 나에게 A가 손짓했다. 계단에 올라선 나는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보았다. 2년간 사귀다 헤어진 미선이 생각이 났다. 무슨 화장품 회사 홍보팀에 들어갔다던가? 부사관으로 말뚝 박아 버린 상민이 녀석도 생각났다. A가 어서 말을 하라고 재촉했다.

 “저는 그동안 술을 많이 마셔서 배가 많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배를 좀 집어넣어 보고자 나왔습니다.” 슬쩍 A를 쳐다보니 A가 팔짱을 풀고 있었다. 나는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또, 저는 체력을 키우고 싶습니다. 거 왜 체력은 국력이다, 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사회생활 해 나가는 데도 꼭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계단을 내려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A가 내가 섰던 자리로 오더니 팔짱을 풀지 않은 채 말을 했다.

 “여러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제 다이어트는 대한민국 표준형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 사항이 되었습니다. 취업, 이성 문제, 체력 모두 다 좋습니다. 표준이 되어야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자, 오늘도 뜁시다. 어제와 같이 B와 ‘가’가 한 팀이 되고 ‘나’와 ‘다’가 한 팀이 됩니다. 서로 마주보고 서 보십시오. B와 ‘가’는 마주보고 서 있는 사람의 따귀를 때리십시오. 그리고 바로 도망치십시오. 자, 시작합시다.”

 우리는 마주보고 서서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차마 내 앞에 서 있던 ‘다’의 따귀를 때릴 수 없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것도 여자에게 손찌검을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머뭇거리고 있자 A가 소릴 질렀다. “어서 때리라니까. 잡아서 때려주면 된다니까.” 나는 ‘다’의 볼을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A가 내 손을 들어 ‘다’의 볼을 내리쳤다. 나는 순간 내리친 손을 황급히 뒤로 거두며 ‘다’의 안색을 살폈다. ‘다’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가’ 역시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A가 우리의 등을 밀쳤다. “어서 튀어.” 우리는 주춤주춤 골목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뺨을 맞은 팀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살기를 느꼈다고나 할까? 당시 나의 느낌은 그랬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뛰기 시작했다. 뒤에서 우리를 쫓는 자들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다’의 억울함 혹은 증오가 담겨 있을 시선이 몸의 속도를 이기고 내 뒤통수에 와 닿았다. 결국 나는 그날 ‘다’에게 기어이 따귀를 한 대 맞고 말았다. ‘다’의 매서운 눈초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달봉이 형은 자신의 클럽 가입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자유로운 영혼. 좀 더 가벼운 체중을 가지게 되면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육중한 몸매를 이끌고 뒤뚱거리며 내 옆에 앉은 달봉이 형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A를 쳐다보았다. 달봉이 형은 나와 같은 팀이 되었다. 몸이 무거운 달봉이 형은 잘 뛰지 못했다. 매번 돈을 잃기 일쑤였다. 따귀, 발길질을 당하는 것은 일상사였다. 그래도 달봉이 형은 기분 좋게 A에게 돈을 냈다.

 “젠장, ‘다’씨 정말 예쁘지 않냐? 이름이라도 알고 싶은데 말이야. 우리 빅 브라더께서 도통 얘기할 기회를 안 주시니 달리 방법이 있나.”

 “익명성이 이 클럽의 규칙인 거 몰라? 내가 보기엔 꽤나 도도해 보이던걸. 형이랑은 여엉 매치가 안 돼.”
 달봉이 형에게는 ‘다’가 클럽 활동의 한 이유가 되어 있었다. 나는 ‘다’가 때렸던 뺨을 슬며시 쓰다듬었다.

 
 시대 본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곳곳에 아직 불을 밝힌 사무실이 눈에 띄었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후 A앞에 다가가 섰다. 건물 사무실로부터 흘러나오는 희붐한 빛이 A의 후광을 밝게 만들고 있었다. A가 시계를 훔쳐본 후 입을 열었다.

 “오늘의 시뮬레이션은 희롱입니다. 여기 있는 남자 두 분과 저까지 셋이서 여성분들의 엉덩이를 쓰다듬을 것입니다.”

 A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가’, ‘나’, ‘다’ 세 여성의 항의가 빗발쳤다. 우리는 성희롱을 당하기 위해 여기 모인 것이 아니다, 나는 탈퇴하겠다, 당신을 경찰에 신고하겠다 등등. 잠자코 여성들의 항의를 듣고만 있던 달봉이 형도 한마디 꺼냈다.

 “저 역시 이번 시뮬레이션만큼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나는 달봉이 형을 쳐다보았다. 분노에 찬 달봉이 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A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쏟아지는 항의들을 듣고 있었다. 나는 A에게 다가가 차라리 이제까지 했던 시뮬레이션 중 하나를 선택해 하자고 제의했다. 마침내 결심을 한 듯 A가 팔짱을 풀고 입을 열었다.

 “조용히 해주시오.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소. 여기 모인 여러분은 그동안 상대의 따귀를 때리고 걷어차고 조롱까지 해왔소. 그런데 엉덩이 한번…….”
 ‘다’가 A의 말을 잘랐다. “당신에게는 엉덩이 한번일지 모르지만 우리 여성들에게는 매우 치욕적인 일입니다.”

 “조용. 아직 말 끝나지 않았소.”

 A가 ‘다’를 노려보며 말했다. 자신의 말이 중간에 잘렸다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의 말투가 평소보다 더 가라앉았다.

 “어떠한 보복 조치도 상관없소. 모두 허용하겠소. 잡기만 하시오. 생각할 시간을 주겠소.”

 말을 마친 A는 화단에서 내려와 시대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와 달봉이 형은 여성들과 떨어져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았다. 세 여성들은 제각각 팔짱을 끼거나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북받친 감정을 다스리고 있는 듯했다. 멍하니 도로 한가운데를 보던 달봉이 형이 입을 열었다.

 “이건 부당한 짓이야. 절대 수긍할 수 없어. 클럽을 탈퇴하겠어.”

 “나도 형 생각과 같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동안 우리가 받아들인 시뮬레이션들 모두가 황당하기 그지없었어. 나도 탈퇴할래.”

 인적이 드문 새벽의 도로엔 이따금 승용차 한두 대가 쏜살같이 우리 앞을 지나갈 뿐이었다. 그때 ‘다’가 A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A가 우리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겠어요. 단, 전 오늘 활동을 끝으로 탈퇴하겠어요.”

 A가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숙였다. ‘가’와 ‘나’도 ‘다’의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달봉이 형이 깍지를 낀 손을 뒤통수에 갖다 댔다.

 “좋소. 모욕을 참는 것도 성공을 위한 미덕이 될 수 있소.”

달봉이 형은 공중으로 치솟고 … "이번엔 내가 쫓는 자다”

그림=김태헌

 A가 달봉이 형과 나에게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을 보냈다. 우리는 죄지은 사람처럼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A는 내게 ‘가’의 엉덩이를, 달봉이 형에게는 ‘다’의 엉덩이를 만지게 했다. A 자신은 ‘나’의 엉덩이를 만졌다. ‘다’의 엉덩이로 향하는 달봉이 형의 손이 심하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는 팔짱을 낀 채 본사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집중하고 있었다. A가 먼저 ‘나’의 엉덩이를 스윽 쓸어내렸다. 곧이어 A는 본사 왼편 골목으로 달아났다. 달봉이 형은 ‘다’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A가 도망간 골목으로 뛰어갔다. 나도 ‘가’의 엉덩이를 한번 쓸어내린 뒤 달봉이 형의 뒤를 쫓았다. 등 뒤에서 우리를 향해 쫓아오는 여성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스팔트에 신발 밑창이 부딪히며 내는 둔탁한 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우리는 언덕길을 피해 될 수 있으면 평지로 난 길을 택했다. 그것이 빨리 지치지 않는 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A는 어디로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와 달봉이 형은 여러 골목들을 휘저었다. 아현동으로 넘어가는 골목으로 접어들 즈음 ‘나’와 마주쳤다. “헉헉, 어떡하지? 밀어붙일까?” 달봉이 형이 말했다. “형이 나보다 덩치가 좀 있잖아. 형이 밀어 붙여.” “다치면 어떡하지?” “지금 그거 따질 때야? 잡히면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고.” “에이 씨” ‘나’가 달려오는 달봉이 형을 잡고 늘어졌다. 달봉이 형은 ‘나’를 살짝 들어 옆으로 거칠게 팽개쳐버렸다. ‘아악’ 하고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골목 담벼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달봉이 형이 미안했던지 넘어진 ‘나’에게 다가가려 했다. 나는 달봉이 형을 잡아끌어 계속 달리게 했다. “괘, 괜찮을까? 충격이 클 텐데.” 내가 대답했다. “썅, 우리 그냥 집으로 튀자. 설마 우리 집을 알겠어?” 넘어진 ‘나’가 우리 둘의 등에다 대고 욕을 퍼부었다. “이 씨발놈들, 잡히면 죽여 버리겠어.” 엇박자의 발소리가 점점 고르게 변하고 있었다. ‘나’가 우리를 쫓아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단전에 힘을 꽉 주고 더욱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달봉이 형의 거친 숨소리도, 달리는 말발굽 소리처럼 거침없이 뛰는 심장 박동 소리도, 아스팔트에 부딪혀 내지르는 신발 밑창의 아우성도,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달려야 한다는 의식밖에 없었다. 굴레방 다리를 지나 달봉이 형과 간밤에 맥주를 마셨던 패밀리마트 앞을 지났다. 건너편 영진수산 간판 속에서 헤엄치고 있던 도미가 눈을 내리깔고 도망치는 나와 달봉이 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영진수산 뒤편으로 나 있는 골목길로 뛰어들었다. 뒤따라오던 달봉이 형이 잠시 숨어있다 가자며 나를 붙잡았다.

 “허억허억, 저, 저기로 들어가자.”

 나는 달봉이 형이 가리킨 곳을 봤다. 따닥따닥 붙은 다세대주택들 사이로 난 조그만 틈이었다. 가로등 불빛이 미치지 않아 잠시 숨어있기에 좋을 듯 보였다. 우리는 바깥을 볼 수 있지만 쫓아오는 상대는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을 우리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숨을 고르는데 애를 먹고 있는 달봉이 형을 부축해 틈 안으로 들어갔다. 상체를 앞으로 바싹 모아야 겨우 앉을 수 있는 곳이었다. 달봉이 형은 몸을 옆으로 튼 뒤에야 겨우 틈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오래된 곰팡이 냄새와 두 남자의 몸에서 풍기는 땀 냄새가 조그만 틈 안에서 서로 엉켰다. 간신히 숨을 고른 달봉이 형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쳤다.

 “여기가 그동안 내가 숨었던 곳이다. 이곳이라면 안전해. 나를 뒤쫓던 분들이 내가 여기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쳤었지.”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적막함이 우리가 머물고 있는 틈을 메웠다. 나는 고개를 내밀어 뒤쫓는 자가 오는지 살폈다.

 “엉덩이가 차가웠었어.”

 어둠 속에서 달봉이 형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는 ‘가’의 엉덩이를 만졌던 손을 얼굴 가까이 대보았다. 기억이 촉감을 재생시켰다. 마치 뜨거운 주전자를 만진 듯한 느낌이 손바닥 전체를 감쌌다.

 “예전에 미선이 엉덩이를 만졌을 때도 차가웠었어.”

 “휴학하기 전에 널 차버린 애 말하는 거지.”

 “실은 내가 찼어. 아니, 찼고, 차였고를 떠나 내가 도망친 거였어.”

 “너한테 취직되면 영진수산에서 회 사준다고 했었지 어제. 사실은 나, 아버지 가게에서 일하려고…….”

 순찰차가 우리가 있는 틈을 지나쳐 사라졌다. 나는 달봉이 형에게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내가 먼저 나와 골목의 입구를 살폈다. 틈을 빠져나온 달봉이 형과 나는 순찰차가 지나간 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A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튀어.”

 달봉이 형과 나는 이쪽으로 뛰어오는 A와 그를 뒤쫓는 ‘가’, ‘나’, ‘다’ 세 여성을 봤다. 우리는 다시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달렸다. 세 여자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거기 서,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테야.”

 세 여자들과 우리 사이의 간격이 조금씩 좁혀졌다. A도 지쳤는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봉원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달봉이 형과 A가 나를 따라 뛰었다. 여자들의 함성은 끊이지 않았다.

 “더, 더 이상 못 뛸 것 같아. 너무 힘들어.”

 달봉이 형이 고르지 못한 숨을 억누르며 말했다. A가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달봉이 형을 일으켜 뛰게 했다. 우리는 지친 달봉이 형을 위해 봉원사로 통하는 언덕길을 포기하고 내리막길이 뻗어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든 도망쳐서 집으로 튈 생각이었다. 내리막길을 달려가는 순간 무릎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아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저 새끼들 잡아.”

 세 여자의 악다구니가 골목을 온통 뒤흔들었다. 때마침 골목 끝에 위치한 방범초소에 있던 순경들이 여자들의 악다구니 소리를 들었다. 잠시 멈칫하던 순경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소리쳤다.

 “거, 거기 서.”

 독기 오른 세 여자들과 순경 두 명이 우리들을 뒤쫓았다. 나는 일이 너무 크게 벌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가까스로 순경들과 세 여자를 따돌리고 아현동 대로변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조금만 더 도망치면 집이었다. 달봉이 형도 나처럼 두려움을 느꼈는지 있는 힘껏 다리를 내뻗었다. 그 순간, A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달봉이 형에게 먼저 도망치라고 소리친 다음, 고꾸라진 A를 부축해 일으켰다. 세 여자와 순경들이 넘어진 A와 그를 부축하고 있는 나에게 손을 뻗어 잡으려고 했다. 다시 달리려고 일어선 A가 ‘윽’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뒤쫓아 오던 순경이 몸을 날려 넘어진 A를 부둥켜안았다. 뒤이어 또 다른 순경이 나를 부둥켜안고 바닥에 굴렀다. 나와 A는 순경들의 품에 안겨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세 여자들은 길바닥에 엎드려 있던 나와 A의 따귀를 거세게 후려쳤다.

 “개새끼들, 버러지 같은 놈들…….”

 나는 그들이 퍼붓는 따귀 세례와 발길질에 정신을 놓고 있었다. 겨우 고개를 돌려 달봉이 형이 뛰어간 곳을 쳐다보았다. 달봉이 형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고 있었다. 눈앞에서 달봉이 형이 날기 시작했다.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달봉이 형은 살랑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날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 여겼다. 도망친 형은 자신이 말한 자유로운 삶의 한 방식을 이뤄내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를 잡고 있던 순경들이 달봉이 형에게 뛰어갔다. 나는 그중 한 순경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혀, 형의 비행을 바,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퇴원 수속을 밟고 나서 달봉이 형이 입원해 있는 병실에 들렀다. 온몸을 붕대로 감싼 달봉이 형은 마치 누에고치처럼 느껴졌다. 내가 들어서자 두 눈을 찡긋거리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달봉이 형의 손가락을 살며시 잡았다. 침대 머리맡에 로즈마리 화분이 놓여있었다. 달봉이 형이 눈짓으로 화분을 가리켰다. 나는 화분을 들어 코끝에 갖다 대보았다. 톡 쏘는 듯한 향이 났다.

 “선영 씨가 주고 간 거야.”

 “누군데?”

 “이니셜 다.”

 “별말은 없었고?”

 나는 A를 의식하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다’는 몸조리 잘하세요라는 말만 던진 후 병실문을 나갔다고 했다. 나는 들고 있던 화분을 도로 침대 머리맡에 올려두었다. 손끝으로 로즈마리 이파리를 살짝 건드렸다. 잠시 뒤, 달봉이 형이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잠 속에서도 향기를 맡는지 이따금 달봉이 형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주인아저씨가 흰 봉투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보증금이 들어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봉투를 받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영진수산에 들러 도미회 한 접시 시켜 소주 두 병을 마셨다. 도미 살은 무미건조한 맛이었다. 나는 와사비를 듬뿍 섞은 간장에 도미 살을 푹 담갔다가 꺼내 먹었다. 코끝을 찌르는 와사비 향 때문에 눈물이 찔끔 흘러내렸다. 어둠은 곳곳에서 내뿜어지는 빛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나는 그 경계선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퇴근하는 사람들과 산책하러 가는 사람들이 어둠과 빛의 공간을 아무렇게나 휘저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친 후 뛰어갔다. 나는 ‘누군가’에게 밀려 바닥에 쓰러졌다. 검은 모자를 깊게 눌러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쓰러진 나를 잠깐 돌아보더니 다시 뛰어갔다. 곧 골목의 어둠 속으로 침잠해 버린 ‘누군가’를 잡기 위해 나는 일어섰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숄더백을 뒤로하고 나는 골목의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또 다른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내 발소리는 쫓아오는 자의 발소리에 밀려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일 뿐이다. 도망친 자도 쫓는 자도 보이지 않는다. 거미줄처럼 펼쳐진 골목길 어딘가에서 그들은 달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를 넘어뜨리고 간 ‘누군가’는 A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이번엔 내가 쫓는 자다.

<끝>


■ 소설 당선소감

“우주 최고의 소설가가 되겠습니다”

 저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합니다.

예전에는 술 취해 개가 됐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적당히 마시다 집에 가서 잡니다. 가끔은 서럽거나 즐거운 감정을 노트에 적어보기도 합니다.

 이거 뜻밖인데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고분고분 축하한다는 저들이 내가 아는 사람이 맞는지 생각했습니다.

 우연하게 문예창작과에 들어와서 운 좋게 등단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몇 초 동안 음모가 아닌지 심사숙고했습니다.

짝사랑했던 그녀에게 멋있어 보이려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했습니다만 결국, 사귀어 보지도 못하고 원망과 푸념을 소설로 풀었습니다. 남자 보는 눈이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던 그녀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문학을 선택해서 행복했습니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문학은 지난 5년 동안 내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우정이 투철한 놈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그 녀석이 보내준 우정을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갚아 나갈 작정입니다. 술 먹고 개가 되니 어쩌니 해도 저는 꽤 괜찮은, 멋있는 촌놈이 되렵니다.

 잘난 아들을 더 잘나게 지켜봐 주신 우주 최고 미남 아버지 김영환, 어머니 김연숙 님, 아들 잘 낳으셨습니다. 밀가루와 관련된 모든 음식을 잘하는 우리 할머니, 증손자 보실 때까지 오래 오래 사셔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배우의 얼굴은 아닌 배우 지망생 귀여운 내 동생 지영아, 오빠가 돈 많이 벌어서 성형해 줄게.

 강원도 삼척시의 F5와 고사리 패밀리들아, 나의 무한한 우정을 받아라.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연이 닿았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랭보의 똘마니라고 자처하는 인호 형, 자칭 천재 시인 현호 녀석, 분명히 태양계 최고 시인이 될 단사마 재현형, 복사를 못 해도 크게 꾸짖지 않는 국가대표 소설가 우현이 형, 촌놈도 서울을 배경으로 소설을 쓸 수 있어요 기호 형, 서울 시티즌이라 미안해요 종은이 형, 술 가르쳐줘서 감사해요 선태 형, 태성 형, 결혼 축하해요 준성 형, 사랑해요 현선 누나, 지웅이 형, 수호천사 정화, 삼척동자라는 귀여운 애칭을 지어주신 윤호병 교수님, 한광구 교수님, 당선 소식에 나보다 더 기뻐해주신 뷰티풀 김다은 교수님, 박지성보다 멋있는 박성원 교수님, 감사합니다 우주 최고 소설가 김성진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김성진

▶1983년 강원도 삼척 출생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3년 재학중



■ 소설 심사평

다이어트라는 흔한 제재를 특화시킨 솜씨 돋보여

소설 본심 심사장면. 왼쪽부터 김형경.박상우.신경숙. [사진=김성룡 기자]

예심을 거쳐 본심에 넘어온 작품은 모두 18편이었다. 예년에 비해 상당히 늘어난 편수였다. 하지만 다채로운 내용과 풍요로운 제재들을 마주 대하며 심사를 하는 내내 한국문학의 내일에 대해 넉넉한 기대감을 부풀릴 수 있었다. 특히 응모작들의 경향이 예년에 비해 현저하게 달라진 점, 그리고 구태의연한 문학적 상상력으로부터 과감하게 탈출하려는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 많아 새로운 세대의 문학적 형성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와 같은 열린 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위태롭게 보이거나 아쉽게 느껴지는 점들도 비례적으로 많았다.

 심사가 시작되자마자 심사위원들은 정통한 소설기법으로 가장 잘 만들어진 작품 하나를 선정했다. 그리고 그 작품이 너무나 모범답안 같다는 이유로 당선작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하였다. 요컨대 신인문학상의 취지에 부합되는 새로움과 미래적 가능성을 주안점으로 삼자는 합의 때문이었다.

약관의 나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필력을 보인 ‘아버지를 찾습니다’나 ‘권군종일명정취(勸君終日酩酊醉)’ 같은 독특한 작품에 대해서는 앞날에 대한 기대로 격려의 말을 아끼고 싶지 않고, ‘아무도 모른다’ 같은 작품은 신인다운 패기 대신 안일한 자기 패턴의 답습이 아쉽게 여겨져 채질 개선의 필요를 느꼈다. 아울러 ‘웰빙’ ‘입술’ ‘혼인비행’ 같은 작품들은 환상과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현실적 제약으로부터 한껏 자유로워진 듯 보였으나, 바로 그와 같은 무경계의식이 문학과 만화 사이의 차별을 확보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보였다. 아무리 무한 상상력을 발휘한다고 해도 문학은 마지막 순간까지 현실에 대한 환기력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새로운 세대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장시간 난상토론을 거듭한 끝에 김성진의 ‘다이어트 클럽’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다이어트라는 흔한 제재를 독특한 아이템으로 특화시켜 매끄러운 흐름 속에 다수의 인물이 자연스럽게 용해되게 하였다. 작품의 밀도나 주제의식의 측면에서 다소 아쉬운 감이 있지만 풋풋한 젊음과 문학성을 겸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른 작품들에 비해 치명적인 결점이 덜하다는 점이 당선작으로 끝까지 남겨지는 행운의 근거가 되었다. 스물다섯, 젊고 싱그러운 신인작가의 탄생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김형경·신경숙·박상우(대표집필 박상우)
 ◆예심위원=전성태·한강·박성원·천운 영·김영찬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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