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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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더 먼 곳을 향하여(39)그래 딸아,애비란다.애비는 거길 갈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로구나.이젠틀렸나 보다.
아버지.그런 소리하시면 아버지도 아니예요.그냥 이쪽으로 걸어오시면 되잖아요.아버지잖아요.
두 팔을 내려뜨린 채 서서,통치마를 바람에 날리며 서서 영실이가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그러나 명국에게는 딸아이의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부연 안개 속인듯이 보라보이는 딸아이의 모습만이 눈물겹고 황홀해서,너로구나,너였구나… 명 국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천천히 명국은 한쪽 팔을 당겨 손등 위에 얼굴을 놓았다.숨쉬기가 조금 편해지는 것 같았다.눈을 껌벅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지켜보면서,명국은 온힘을 모아 이제부터 자신이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려고 애썼다.
자력으로는 어떻게 해서도 이 탄더미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사실이,그것을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고통이 목구멍 저 밑에서부터 치밀고 올라왔다.차마 이렇게 죽을 줄이야… 눈을 감으면서명국은 볼에 대고 있던 손등을 이빨로 깨물었다 .
이럴줄이야.이런 어이없는 일이 터질 줄이야.손등을 깨문채 명국은 번쩍 눈을 떴다.그랬지.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어.오늘 내일 하면서,날을 잡던 길이었어.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탄더미에 깔려 개죽음이라니.
가물가물 눈앞이 흐려오는,아주 먼 곳에서 또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왜 이러세요.아버지가 이러심 어떡해요.
내가 뭘 어쩐다고… 그러니.
눈 감으심 안 돼요.저는 어떡하라고요.
그래,네가 있지.애비한테는 네가 있었지.아암 그렇구 말구.눈을 뜨라면 떠야지.
돌을 매단듯 무겁게 내려오기만 하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명국은 딸아이에게 말했다.애비는 말이다.한번 살아 보고 싶었다.
이렇게 말고 제대로 좀 한번 살고 싶었다.
나한테 시집이라구 올 때 네 에미가 열여섯살이었다.내가 한 살 어려서 열다섯이었어.그때 내가 뭘 알았겠니.그렇게 만나 네에미랑 살았다.불쌍한 사람이지 네 에미.없는 집에 와서 못난 애비랑 살면서,배를 안 곯았겠니 비단 옷인들 한 번 제대로 걸쳐를 보았겠니.남의 집 딸 데려다가 안한 고생없이 시킨 거,그게 제일 가슴 맺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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