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 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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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남녀가 각각 4명씩 모두 8명이었는데 동전이 6개밖에 없는 까닭은,한쌍에게나마 운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뜻에 따라서 짝을 맞추는 기회를 주자하는 취지였습니다.남자 쪽에서는 내가 동전을 집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으니까 나는 무조건 여자쪽에서 동전집기를 포기하는 한 애와 파트너가 돼야 하는 거였습니다.나를제외한 세 악동이 동전을 하나씩 집어들었습니다.
여자애들이 서로 한동안 자기들끼리 눈치를 보는데,써니가,자 하나씩 집어라고 했습니다.그러자 여자애 둘이 각각 손을 뻗어 탁자 위의 동전을 하나씩 집어들었습니다.동전은 하나가 남았는데아직 동전을 집지 않은 건 양아와 써니 뿐이었습 니다.
『뭘 기다리니.저 동전은 니 꺼야.』 써니가 양아에게 그렇게말하면서 웃는 순간 나는 속으로 와아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써니와 내가 짝이 된 것이고,뿐만 아니라 동전에 쓰인 숫자에의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분명한 뜻에 의해서 당당하게 짝이 된 것이니까 그랬습니다.더 군다나 나는 자칫하면 양아의 파트너가 될 뻔하는 위기에 처하기까지 했던 거였습니다.
양아가 집어든 동전에는 2자가 쓰여 있었고 그래서 양아는 상원이의 짝이 되었습니다.난 사실 상원이한테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상원이도 뱀 밟은 것 같은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각자의 파트너가 정해졌으니까 일단 쌍단위로 찢어지기로했습니다.이런 경우엔(쌍별로)헤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는 걸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다들 같이 뭉쳐 있어 봤자 서로 자존심만 세우기 때문에 친해지는 진도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거지요.
각 쌍별로 개별행동에 나서면,그때부터는 저마다의 자기짝에 대한 호감도와 능력에 상응하는 결과를 맞을 거였습니다.눈이 맞은나하고 써니가 제일 먼저 날개에서 빠져나온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모험이었는데 내 예감이 들어맞아서 다행이야.』 길에 나와 써니와 함께 인파를 헤치며 걷다가 내가 말했습니다.
써니는 내 말에 빙그레 웃기만 하다가 딴 말을 했습니다.
『우리…어디로 가는 거지?』 나는 사실 어디로 가고 있는 건아니었고 다만 길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써니와 나만이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라는 걸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사실 주머니속에 든 것도 없었습니다.
『좋을대로 해,난 돈도 없으니까.』 『그럼 어떡해.난 뭘 좀먹어야겠는데….』 『이거 참…벌써부터 먹여 살릴 걱정을 해야 하네.』 써니가 또 웃었습니다.써니의 웃는 표정은 놀랄만큼 멋있어서 나는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거릴 지경이었습니다.그애의 미소짓는 얼굴만 보고 있을 수 있다면 난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써니와 나는 그날 참 많이 걸어다녔습니다.날이 어두워진 다음에는 신촌 네거리 근처의 중소기업은행 입구의 계단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서 이야기했고,거기서 일어나 다시 걸을 때에는 우리는 잠깐 손을 잡고 걷기도 했습니다.나는 손에 땀 이 난 것이창피해서 써니의 손을 오래 잡고 있지 못했습니다.행복했지만 그때쯤에는 나도 몹시 배가 고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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