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비핵화선언 재고」의 파장(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이홍구 통일원장관이 남북한 비핵화 선언을 『이미 어떤 의미에선 무효화됐으며』 『새로운 각도에서 논의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함으로써 재검토 가능성을 내비쳤다. 북한이 순수한 실험용이라고 주장하는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이 핵재처리시설임이 밝혀지면서 비핵화선언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여러차례 제기돼왔지만 고위 정책당국자가 공식적으로 분명하게 거론한 것은 처음이다.
비록 이 장관이 재검토의 전제로 『북한이 방사화학실험실을 계속 유지할 경우』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비핵화 선언의 재검토란 핵무기를 한반도에 들여놓지 않고 핵재처리·우라늄 농축시설을 갖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재고할 수 있다는 의미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지금까지의 남북한관계 기조는 물론 이를 전제로 진행되어온 북핵대화의 기조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 우리가 추구하는 정책방향이 아니라 다만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현실인식에 따른 우려에서 나온 가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이 발언은 앞으로의 남북한관계는 물론 북한과 미국의 대화를 두고 여러모로 함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먼 앞날 우리의 에너지정책과도 관련해 음미해볼만하다. 우선 이 장관의 발언이 북한에 대해 핵문제와 관련해 우리의 단호하고도 명백한 의지를 보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 의혹을 씻지 못하고 핵재처리시설을 가동하며 비핵화 선언을 지키지 않는데 우리만 일방적으로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비핵화 선언은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이란 의미에서 우리의 국가적 이익을 희생한 측면이 적지 않았다. 에너지정책에서 보자면 핵은 경제적으로나 기술적으로 훌륭한 국익수단이다. 스스로 핵재처리시설을 포기한 것은 오로지 서로가 핵무기를 만들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목표를 이룰 수 없다면 우리가 북에 대해 마땅한 대응수단을 찾고 경고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미 대화와 관련해서도 혹 미국이 핵비확산조약(NPT)체제 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졸속하게 타결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로서의 효과도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이미 한 두개의 핵무기를 보유했다면 그 선에서 동결하는 조건으로 매듭지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일부 주장을 배격하는 효과가 있다. 그럴 경우 우리도 비핵화 선언에 매이지 않겠다고 할 때 전략적으로나,또 경제적인 이유로나 한반도의 비핵화를 바라는 미국이 우리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 지금까지 핵문제에 관한한 별로 카드를 못만들었던 우리 입장에선 이 장관의 발언은 하나의 유효한 지렛대를 마련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발언의 궁극적 목표가 한반도의 비핵화에 있음은 물론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