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랑>세계 10대 출판국의 실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대학교수들이 무녀「시빌레」가 되기로 작정하고 나섰다.몇몇 대학교수들이 동.서양의 고전 가운데서 명저들을 엄선해 학생들에게읽기를 권면하고 나선 것이다.
시빌레는 로마의 왕 타르킨에게『운명의 책』을 살 것을 권했다.왕은 책값이 너무 비싸 두번이나 거절하다가 결국엔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태워버리고 남은 책을 비싼 값을 주고 사게 되었다.타르킨이『운명의 책』을 사서 처음부터 읽었더라 면 파국이 기록된 마지막 몇 페이지를 보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르지 않아도되었을 것이다.
학창시절에 읽은 책 한권이 그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은 예를 우리는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젊은 날에 이런『운명의 책』을 만날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다.「책 읽히기」에 대학교수들까지 발벗고 나설 수밖에 없는 작금의 독서풍 토가 눈물겹기까지 하지만,그중의 어느 한권이 한 젊은이의 인생에 큰 좌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할때 두손 높이 들어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정작 이 고전명저들을 어떤 판본으로 읽혀야 하느냐에는 어느 누구도 선뜻「아무개 판본」을 읽으라고 자신있게 권유할수 없을 것이다.많은 책들이 아직도 중역(重譯)의 너울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고,때로는 오역의 멍에를 그대로 눌러쓴채 돌아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 最古의 금속활자를 자랑하고,한편으론 세계 10대 출판국운운하는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번역본 하나 없다면 문화민족의체면으로서 말이 아니다.그동안 우리 출판계와 학계에서는 무엇을해놓았나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고 전 명저들의 선정에 앞서「아무개 판본」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다.양적으로 세계10대 출판국임을 내세우기보다는 갈리마르의「플레야드」총서처럼 제대로 된 고전총서 하나 가꾸어가는 것이 더 낫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