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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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1부 불타는 바다 더 먼곳을 향하여(27) 어쩐 일로 오늘은 이렇게 편안한 말씀만 하시나,속으로 웃으면서 길남은 명국을따라 걸었다.아침햇살이 눈이 부시게 유리창을 비추고 방파제 위로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정말 오늘 일은 안 나가실 겁니까?』 『일 되겠냐?다들 저러고 있는데.』 『오늘 당장이 문제가 아니라…나중에 또 안좋은일이나 생길까 그게 걱정이네요.』 『안 좋아 봤자 뭐 별 거 있겠냐.몇사람 잡아다가 또 닥달이나 하겠지.누가 사주를 했느냐,주동자가 누구냐 하면서 말이다.보아하니 이 사람들이 제일 싫어 하는 게 조선사람들이 패거리 지어서 뭔가 일 벌이는 거 같지 않니.』 방파제 밑을 걸어나가면서 길남은 문득 조씨를 떠올렸다.유난히 이번 일이 있고부터 그 양반이 나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씨 말인데요,그 양반 믿어도 되는 그런 사람인가요?』 명국이 걸음을 멈추었다.
『왜?조씨가 너보고 뭐라든?』 『그런건 아니지만,난데없이 이번 일에 그 양반이 좀 설친다 싶어서요.』 『해보라지.누가 조씨 아니랄까봐 사람이 좁쌀같은 위인인 거야 알지만,누가 알겠냐?먼저 난 머리보다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는 말도 있는데,저도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러겠지.』 멀리 숙사 앞에 모여 있는 조선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명국이 말했다.
『내 이런 말을 너한테까지 할 건 아니다만 저래 가지고는 될일도 안된다.중구난방 다 나서서 한마디씩 아니냐.』 『그러니 어쩌겠어요.아저씨부터도 뒷짐만 지고 계시는 판이잖아요.』 이 녀석이 또 나서고 싶어서 이러지,그저 남의 일을 그냥 두고는 못보는 녀석이라니까.그런 생각을 하면서 명국은 딴소리를 했다.
『내 글은 모른다만 어려서 읽은 말 가운데,토적성산이라는게 있었다.한 줌 흙이 쌓여서 산을 이룬다는 소리지.그런데 그것도흙나름이 아니겠냐 싶다.개꼬리 삼년 묻어둔다고 그게 어디 여우꼬리 되겠냐 그말이지.배운 거 없는 무지랭이 백 이 모이면 뭘하고 천이 모이면 뭐가 되겠냐.』 『아저씨도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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