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백화점(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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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쌍의 촌로부부가 으리으리한 백화점 정문앞에서 기웃거리기만 하고 차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들 부부는 결심한듯 각기 신발을 벗어 신문지에 싸들고 조심스럽게 백화점안으로 들어선다. 들어서자마자 이들은 휘황찬란한 모습에 놀라 도무지 발을 떼어놓지 못한다. 한참을 선채로 두리번거리만 하다가 안내원에게 이끌려 그들의 목표인 승강기(엘리베이터)쪽으로 간다. 줄서서 한참을 기다린뒤에야 가까스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문이 닫히자 노파쪽은 마냥 군실댄다. 『갑갑해 죽것는디 어쩐 일루 마냥 서있기만 한데야』 『어쩐 헛구역질이 자꾸 난데야.』 그러다가 갑자기 문이 열리자 부부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작고한 행인 이승만화백이 회고한 30년대 화신백화점의 어떤 모습이다. 27년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삼월백화점이 들어서고,그로부터 4년뒤인 31년 종로 네거리에 화신백화점이 문을 열면서 이 땅에도 본격적인 백화점시대가 개막됐다. 삼월백화점이 일본인이 경영하던 삼정양복점의 후신이었던데 반해 화신백화점은 지물포를 경영하던 박흥식이란 20대 청년에 의해 설립됐다는 점에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더욱 친밀감을 주었다. 화신백화점 구경이 창경원 동물원 구경과 함께 그 무렵 최대의 구경거리였던 것은 당연했다.
그같은 폭발적인 인기 때문에 박흥식씨는 「조선 제1의 부자」 「백화점의 왕」 따위의 호칭을 얻으면서 착실하게 부를 쌓아갔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시대였던 만큼 그가 부를 쌓아나가는 과정에는 달갑지 못한 풍문들도 뒤따랐다. 총독을 비롯한 일본인 유력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금박 명함을 마구 뿌리고 다녔으며 「황군」의 승전을 위해 여러대의 비행기를 헌납했다는 따위의 뒷소문들이 그것이다.
55년 화신 건너편에 신신백화점을 설립해 이 땅에 「백화점 신화」를 창조하겠다는 그의 꿈이 영그는가 싶었으나 계속된 사업확장이 잇따라 실패하자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좌절은 「돈은 어떻게 버느냐 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그리고 「언제든지 과욕은 화를 자초한다」는 점을 다시금 일깨운다.
그가 화신백화점을 설립했을 때 품었던 야망처럼 유통왕국 건설에 전념했던들 지금은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을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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