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R&D체제 이렇게 고치자] 上. 예산 둘러싼 부처간 갈등 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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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6면

과학기술처 혼자 했던 R&D 사업은 현재 전체 규모 5조6천여억원, 관여하는 정부 부처 16개로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렇게 사업규모가 커지자 이들 부처의 R&D에 관한 업무조정을 하기 위해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1999년 생겼다. 장관들과 민간위원들이 참여하는 과학기술 관련 최고 정책 결정 기구다. '경제장관회의'의 과학기술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최근 국가 R&D 체제를 재편하겠다는 정부 복안이 나오는 것은 그동안의 업무조정이 매끄럽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R&D 예산 규모가 큰 과기.산자.정통부가 갈등의 핵심이 됐다. 서로 자신들이 차세대 성장동력 10대 산업 중 특정 산업을 맡아야 한다고 나선 것이다. 지금의 국가 R&D 체제 개편은 그동안의 이런 불협화음과 삐걱거림을 고쳐보자는 의도다.

◆국가 CTO 역할해야=요즘은 기업체들마다 기술담당최고임원(CTO)이 필수다. 과기부 장관이 해야 할 역할이 바로 이것이라고 과학기술계와 산업계는 지적한다. 최영락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원장은 "주요 내셔널 어젠다를 설정하고 이를 기술과 연결하는 게 국가 CTO가 해야 할 임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전략적인 예산 배분권이 필수다.

하지만 최근 등장하고 있는 '기술부총리'라는 직함에 대해서는 과학기술계의 거부감이 크다. 서울대 최재천 교수는 "과학기술은 과학과 기술인데 과학은 떼버리고 기술만 논의된다"며 "이런 식으로는 지금도 홀대하고 있는 기초과학을 더욱 홀대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호군 전 장관도 "과학은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기술은 있는 것을 개량하는 것"이라며 "부총리로 격상되더라도 재경부.교육부처럼 직위는 그대로고 직급만 격상되는 것인데 왜 과학기술 부총리라고 안하고 기술부총리라 부르는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자문회의와 국과위 역할=그동안 역할에 혼선이 있었던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철저한 역할분담으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그동안 국과위에 제구실을 못하자 자문회의 위원장을 대통령으로 하고, 각 부처 장관들을 위원으로 참여시키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국과위와 위상이 겹친다는 야당의 지적을 받고 유야무야됐다. 崔원장은 "자문회의가 정책기구인 국과위와는 다른 자문기구로의 역할을 충분히 하기 위해선 민간위원들의 수를 늘리는 방향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국과위와 자문회의에 모두 있는 민간위원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기발한 발상을 위해서는 민간 위원들을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 반면 국과위 산하 위원회들을 활성화해 연구계의 다양한 의견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경제계의 목소리가 좀 더 반영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원훈 산업기술연구회 이사장은 "경제5단체가 국가 R&D 정책 결정에 제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국과위 민간위원들이 민간인 자격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경제5단체장에 민간위원의 자격을 주면 자연스럽게 정례적으로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朴이사장은 "지금까지는 R&D 정책 결정에 기업의 기술연구소 관계자만 참여했지만 앞으로는 R&D가 기업 생존과 직결된 만큼 대표성을 가진 산업계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업무영역 어디까지=경제와 산업에 관련된 부총리가 두명 생겨 경제부총리와 역할이 충돌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R&D 예산 배정권을 넘겨 받는 방향으로 과학기술 부총리 역할이 정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 전체 예산에서 1백17조의 예산 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경제부총리와 6조의 R&D 예산을 다룰 과기부총리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지나친 우려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전체 예산에서 R&D 예산을 일단 배정받아 예산을 나눠주면 된다는 것이다.하지만 경부고속철 등 국가 차원에서 추진하는 거대 국책사업이 기술과 밀접하게 관련된 경우 업무분담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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