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시대의 어느 교훈/본인 허락받은 차명예금 실명전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투신사,위임장없이 해주고 “곤욕”
금융실명제 시행이후 차명·도명계좌의 편법 실명전환이 적지 않을 것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최근 이와관련해 사뭇 구차스럽지만 어떤 의미에서 교훈적이기도 한 해프닝이 하나 빚어졌다.
증권감독원이 경기도 광명에 사는 고모씨(31)의 민원을 접수해 처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사연이다.
고씨는 지난달 18일 증감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냈다.
『간호보조사인 여동생이 세금우대 저축인 「내집마련 주택부금」을 다달이 부어나가던중 지난달 거래 은행으로부터 「다른 세금우대 저축에 들어있는게 최근 확인돼 계속 불입해도 혜택을 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알아보니 전에 근무했던 J병원 원장 부인이 지난해 3월 동생명의로 몰래 D투신사의 세금우대 소액 채권저축에 가입해놓고 실명제가 시행되자 지난해 10월 도명 상태로 슬쩍 실명전환을 했다. 투신사담당 과장은 원장 부인이 떼어다준 주민등록등본만 대조하고 실명전환을 해줬다. 병원의 직원들 상당수가 비슷한 피해자다.』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증감원이 특검반을 내보내 지난달 20일부터 25일까지 조사해본 결과 투신사측이 실명확인을 제대로 안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기승전결은 진정내용과는 조금 달랐다.
증감원의 조사결과는 이랬다.
『원장 부인이 직접 퇴직금 적립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이자수입을 늘리기 위해 간호보조사 등 직원 10명의 이름을 빌려 세금우대형 및 연금형 저축 20개를 들었다. 본인들에게 알려 양해까지 구했다. 이후 실명제가 시행되자 이중 5명은 적극 협조,직접 나서서 실명전환을 해줬지만 나머지 5명의 경우 당직근무,개인적 사정 등으로 시간을 내지 못했다. 마감에 쫓긴 병원측은 대리인을 시켜 투신사측에 이들의 주민등록등본과 신분증 등을 제시하고 일괄 실명전환을 요청했다. 투신사측은 「괄시할 수 없는」 고객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어 이를 처리해줬다.』
고씨는 당시 병원측과 「좋지않게」 헤어진 여동생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듣자마자 병원과 투신사를 상대로 사과와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이들은 여동생이 세금혜택을 못받게 된 피해금액과 해당 통장으로 인해 병원측에서 부당하게 이득 본 금액(모두 합쳐 37만여원)을 물어내겠다고 했으나 고씨는 단호히 거절하고 증감원 진정쪽을 택했다.
그러나 고씨는 증감원 특검이 끝나갈 무렵 돌연 진정을 취하했다.
고씨는 『특검이 나오면서 투신사 담당 직원의 처지가 너무 딱하게 돼 증감원측에 정상참작의 여지를 주고 싶었다』며 『취하해주면 「섭섭치 않게」(고씨의 얘기로는 3백만원에서 6백만원 사이) 보상하겠다고 해 받기로 했지만 그것 때문에 취하한 것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증감원은 이번 진정 건에 대해 실명제 관련규정상 병원측에 대해서는 문제삼을 수 없으며 다만 D투신에 대해서는 관련자 징계 등이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고씨가 진정을 취하하자 과연 「정상을 참작한듯」 증감원측은 특검이 끝나고 보름이 지난 10일 현재까지도 아무런 징계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대략 이같은 사연의 해프닝이 주는 실명제시대의 교훈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실명제 시대에 차명·도명 계좌를 갖고 있으면 결국 본인들에게 들통나게 되어있고,「이름주인」들이 골탕 먹이려 들면 결국 당할 수 밖에 없다.
▲실명제 위반 사안은 일단 외부로 불거져 나오면 해당 금융기관이 가장 먼저,그리고 가장 많이 다치게 되어있다.
▲감독기관은,적어도 증감원은 금융실명제 긴급명령을 제대로 적용하려들면 걸려들 금융기관이 많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가급적 문제를 확대시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금융실명제 긴급명령이 지나치게 엄한 것인지,증감원이 업계를 봐주려 하는 것인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김동균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