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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로 공부하면 부정행위 리포트 조금만 베껴도 학사경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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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호 04면

2003년 11월 중순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한 사립 명문고교. 김익환(가명)군은 영문도 모른 채 미적분 시간에 ‘cheating’(부정행위) 경고를 받았다. 몇 년치 수업내용과 시험문제 등이 적혀 있는 노트, 이른바 ‘족보’를 갖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 김군은 “이미 유포된 수업자료를 입수해 공부하는 건 한국에서 오히려 부지런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담당 교사는 “다른 학생과의 정보 형평성에 어긋나고 무엇보다 정직하지 못한 행위”라며 고개를 저었다. 김군은 학교장과 오랜 시간 토론을 벌인 끝에 처벌은 면할 수 있었다.
‘기출문제집’(족보)를 구해 시험에 대비하는 것은 국내에선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은 사정이 다르다.
어린 학생이 국내에서 다른 학교로 옮길 경우 바뀐 환경에 적응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국가를 달리할 때는 어떠할까. 그러나 열풍은 조기유학의 어두운 면조차 장밋빛으로 바꿔놓는다.
‘표절’과 ‘부정행위’는 한국 조기유학생들이 가장 자주 봉착하는 문제다. 미국 수능(SAT), 학교시험, 선이수학점(AP), 페이퍼 등에서 교칙위반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사활동 빠지면 벌점 받아
미국 동부의 사립고에 재학 중인 이명지(가명)양. 역사과목 시간에 이양은 지난해 같은 교사에게 수업을 들었던 친구의 리포트를 빌렸다. 그러곤 이를 그대로 베껴서 제출했다가 ‘plagiarism’(표절) 판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김양에게 주어진 벌칙은 ‘Disciplinary probation’(정학을 예고하는 학사경고). 이듬해 이양은 또 한번 친구의 화학리포트 일부를 보고 썼다. 두 학생이 똑같이 틀리게 답을 쓴 것을 발견한 담당 교사는 이를 부정행위로 간주했다.
결국 이양은 두 번째 학사경고를 받고 힘들게 들어간 학교를 제 발로 걸어 나와야 했다. 보통 사립학교에서는 2~3번의 경고를 받으면 학교에서 정학당할 뿐만 아니라 대학 지원 시 개인 이력에도 기재하는 불이익을 준다. 시험도 아니고 리포트를 낼 때 표절이 문제가 돼 학교를 못 다니게 된 것은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문화적 차이는 인터넷 자료를 보는 시각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에서 3년간 공부하고 귀국했다가 다시 아일랜드로 건너간 정구필(17·캐슬녹 칼리지)군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선 수행평가(내신에 반영되는 과제물)를 할 때 거의 인터넷에 있는 정보를 따다 싣는다. 외국에선 스스로 해야 한다. 한국 학생이 과제를 낼 때 카피와 패이스트(copy and paste: 긁어 붙이기)를 하면 과제를 다시 내주거나 심하면 정학시키기도 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 있는 P학교나, 뉴욕주에 있는 S사립학교는 다른 학교에서 정학이나 퇴학 처분을 받은 아이들이 모여드는 학교로 더 유명해졌다.
 
예체능 무시했다간 낭패
표절이나 부정행위 외에 자주 겪는 일이 또 하나 있다. 한국 학교는 국어·영어·수학 등의 주요 과목만을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예체능을 경시한다. 하지만 외국의 대부분 학교에선 수업·운동·클럽 등 모든 학교활동(commitment)을 균등하게 이수해야 한다. 특히 지역사회 봉사활동을 매우 중시한다. 학점은 얼마 안 되지만 인성교육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떤 활동이든 빠지면 벌점(absence point)을 받게 된다. 메이저 과목 3점, 스포츠 2점, 마이너 과목 및 봉사활동이 각각 1점씩 쌓인다. 이런 벌점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은 평소에는 예체능 수업에 잘 들어가다가도 시험이 닥치면 한국 학교 시절의 버릇이 되살아난다. 국·영·수 시험공부를 하느라 예체능 수업이나 봉사활동을 빼먹는 것이다.
학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미국에선 메이저 과목에서 아무리 점수를 잘 받아도 이런 벌점이 15점 이상 정도 쌓이면 학교 징계위원회에 소환돼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학부모에게는 ‘자녀가 이러이러한 사유로 심각한 기로에 놓였다’는 통보가 전달된다. 한국 학부모들은 주요 과목의 점수가 좋은 자녀가 클럽활동 같은 데 불참했다는 ‘사소한 문제’로 위험에 처한 상황을 납득하려 하지 않는다. 학교 측이 ‘관용’을 베풀기 바라지만 상황은 간단치 않아 얼굴을 붉히고 나오는 경우도 많다. 뉴질랜드에서 유학한 박세진(25)씨는 “벌점을 받지 않더라도 한국 학생은 메이저 과목 이외의 활동을 조금밖에 하지 않는데, 그러다간 대학 진학 시 큰 영향을 미치는 성적표 상의 ‘교사 의견’에서 거의 점수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초등학교부터 미국에서 유학한 일리노이 주립대 2학년 이영석씨는 “미국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인 듯하지만 실제로 규칙을 엄격히 적용한다”면서 “한국식으로 인정에 호소해 풀려고 덤볐다가는 큰코다치기 일쑤”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 교사들은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에서 주의사항을 거의 일러주지 않아 조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학생·학부모가 전하는 현지 적응 요령

현지 외국 친구와의 유대 중요
현지 문화를 무시하는 듯한 오만한 태도가 현지인의 반발을 사기도 한다. 말레이시아 유학생 학부모 박성옥(41·여)씨는 “한국 학생이 늘면서 유색 인종 친구들을 깔보거나 선생님에게 건방진 태도를 보이고 수업시간에 한국말로 떠들기도 한다”며 “미국 등 백인 사회로 유학갔다면 꿈도 못 꿀 일”이라고 지적했다.
언어 문제도 마찬가지다. 외국에 나가 있다 보면 저절로 영어가 늘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부모가 많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4년 있으면서도 영어를 거의 못하는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차라리 외국인 강사를 데려다가 재우고 먹이고 하면서 영어를 배우는 게 낫지 조기유학 다녀왔다고 영어가 느는 것은 아니다.”(박세진)
“토익·토플 성적이 엄청나게 좋은 중학생도 있지만 말하기와 듣기가 안 되면 소용이 없었다. 그게 안 되니 모든 게 힘들어진다. 그러면 일탈을 하게 되고 영어 못하는 학생들끼리 거대한 집단을 이루게 된다.”(정구필)
올해 1월 다보스 포럼에 최연소 패널로 참가한 최유선(23·여)씨.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앞에서 세계교육기금 마련을 주제로 당찬 영어 토론을 해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도 외국 경험만으로 외국인과 겨뤄 자신을 표현하고 주장을 관철하는 능력을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말한다. 최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녔다. 그러나 “정작 영어실력을 키운 것은 이화여대 국제학부에서 토론 동아리 활동을 주도하면서였다”고 밝혔다.
유학생들은 현지 외국학생과 긴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언어장벽을 극복해야 한다. 캐나다에 유학했던 박신우(18)군은 “친구들과 친해지는 게 급선무”라며 “운동을 같이하면 언어도 익히고 친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유학생 이창수(24)씨는 “나는 얼굴만 알면 먼저 들이대는 성격이라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라”고 조언했다. 이혜나(22·여)씨는 “외국인들은 겸손한 걸 좋아한다”며 “그게 상대방과 가까워지고 자기 주장을 자연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의지로 향수를 극복해야
외로움을 이겨내는 것도 과제다. 공부에 대한 억압, 경제적 불안, 향수병, 고정관념 등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이른바 ‘외국인 학생 증상’에 시달린다. 고교 때 캐나다로 유학했던 박산돌(20)씨는 “가디언(현지후견인)이 있긴 해도 부모님과는 달라 혼자 울면서 걸어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고 했다. 이를 극복하는 것은 강한 의지밖에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누가 뭐라 하든 말든 오전 5시에 일어나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마음을 독하게 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신문을 스크랩하면서 혀를 굴려보고 ‘한국인들과 몰려다니지 말자. 마음자세를 잘 잡아야 한다. 술·담배·마약을 멀리하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학교에서 오후 4시쯤 돌아온 뒤에는 (어울리지 않으려고) 잠을 청했다.”
 
귀국 후 적응 미리 대비
조기유학을 마친 뒤 다시 한국 교육현실에 적응하는 문제도 쉽지 않다. 외국에 비해 긴 수업시간, 형식적인 클럽활동 등이 ‘역(逆)문화충격’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초등학교 유학이 많아지면서 초등학교 때 필수적으로 깨쳐야 하는 핵심 단어나 사자성어를 몰라 한국어 능력이 현저하게 뒤처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 때문에 안양외고 등 일부 외고와 민사고는 토플과 더불어 한국어능력 검정을 요구하고 있다. 정구필군은 “대입 준비에 열을 올린 한국학생 사이에서 한국어도 서툰 우리가 적응하긴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성남시 분당에 사는 김미선씨는 주변에서 가족해체로까지 치닫는 ‘기러기 아빠’ 문제를 보고 딸을 조기유학 보내려던 마음을 바꿨다. 김씨는 “자녀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없어지고 돈만 주는 사람으로 보고, 부부간의 정도 식어가더라”고 말했다. 가족의 정이 엷어지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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