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회장 항소심 '집유 + 사회봉사명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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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 형사10부(수석부장판사 이재홍)는 6일 900억원대의 회사 돈을 횡령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및 횡령)로 기소된 정몽구(69.얼굴) 현대차그룹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세 가지 사회봉사 명령도 이례적으로 내렸다.

<표 참조>

재판장인 이재홍 부장판사는 이날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가 정 회장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냐는 세간의 인식을 불식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동료 판사들은 물론 검사.변호사.언론인.경제인, 심지어 택시기사와 상인들의 의견도 물었다"고 입을 열었다. 이런 '여론조사'를 한 이유를 "형량을 정하는 데 있어 독선적으로 보이기 싫었다"고 설명했다.

실형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소개했다. 10% 남짓한 지분으로 경영권을 남용하고 자녀에게 승계하는 재벌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견해였다고 한다. 미국 법원은 회계 부정을 저지른 엔론사 사주에게 20년이 넘는 형을 선고했다는 얘기도 나왔다고 전했다. 하지만 집행유예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많았다고 전했다. "정치인들이 정치자금을 요구하니까 기업인들이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두 가지 의견 중에 이 판사는 후자를 선택했다고 털어놨다. "우리나라 경제에서 현대차의 파급 효과는 상당하다"며 "미국에선 엔론 같은 회사가 20개 부도 나도 끄떡없다"고 지적했다. "선고 당시 엔론은 이미 죽은 회사였고, 현대차는 살아 있는 회사"라고도 했다.

사회봉사명령에 대한 설명도 했다. 이 판사는 "감옥에 보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며 "실질적인 죗값을 치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재능으로,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사회에 실질적인 공헌을 하게 하는 게 진정한 사회봉사명령"이라고 해석했다. 8400억원의 사회 공헌을 두고 한 말이다. 판결 후엔 "종래 사회봉사는 쓰레기 청소 등의 정도였지만 봉사 활동의 폭을 넓혀 '제3의 길'을 찾자고 생각했다"는 말도 했다. 그는 "내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었을 때 부유층보다 서민층이 집행유예를 더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흥미로웠다"며 "서민들이 얼마나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재판 후반 이 판사는 다소 숙연한 표정으로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고 비판하면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법정에 나온 정 회장은 재판 초기에는 굳어 있었다. 그러나 집행유예 선고 기미가 보이자 안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회 공헌을 성실히 이행하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집유가 선고되자 "네"라고 큰 소리로 대답한 뒤 밝은 표정으로 법정을 나섰다.

박성우 기자

◆사회봉사명령=통상 사기.횡령.배임의 유죄가 확정된 범죄인에게 봉사 활동을 하도록 한 제도. 영국에서 범죄인의 근로의식 고취를 위해 처음 도입됐다. 성인의 경우 500시간 이내에서 내려진다. 자연보호.문화재 보호 활동, 복지시설 봉사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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