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곡) 굴 길(도)(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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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길이란 순수한 우리말이다. 어디서 유례됐는지에 대한 한 한글학자의 설명이 재미있다. 골(곡·동) 굴 길(경·로)은 모두 「○」을 어원으로 한다. 주거처인 「골」에 있는 「굴」에서 식수원인 개울과의 사이를 잇는 통로가 「길」이라는 것이다. 원래 한 말이었던 「○」이 골과 굴과 개울과 길을 왕래하면서 각기 분화됐다는 설명이다.
원시시대 이 길이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번영과 개발을 상징하는 길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착취와 수탈을 몰고오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길의 의미도 바뀌고 있다.
이 길이 오늘의 국도수준으로 넓혀진게 일제시대부터였다. 당시 신작로로 불렸던 새 길은 곧 일제식민지 지배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로마의 길이 세계로 열렸던 까닭도 제국의 세계화를 위한 길이었듯 일제의 신작로도 착취의 도구였고 제국지배의 통로였다.
5·16을 지나면서 고속도로가 뚫리고 물동량이 급속히 늘면서 경제개발이란 곧 도로확장이었고,넓은 고속도로는 부와 번영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개발 곧 도로확장이라는 등식이 이젠 환경파괴로도 이어졌다. 길이란 인간의 주거와 의식 사이를 반복적으로 연결하는 공간적 선이라는 의미에서 주거와 의식을 함께 파괴하는 무서운 존재도 되고 있다.
지리산을 분리하는 20여㎞의 관통도로가 생겨난게 85년. 인파와 차량행렬로 신비스런 노고단 일대는 이젠 황폐한 주차장이 되었고,심원계곡은 행락객들이 버린 오물로 더럽혀졌다. 여기에 더해 벽소령 횡단도로마저 아스팔트 포장작업을 벌이고 있고 강원도 마지막 비경 내인천지역에도 도로확대포장 공사를 벌이고 있다. 모두 울창한 숲을 발가벗기고 희귀조와 식물들을 자취없이 사라지게 하고 있다. 골과 굴과 개울로 가기 위해 길이 필요한데 길을 위해 골과 굴과 개울을 모두 파헤치고 있다.
서울 시민들의 골이고 굴이고 개울인 북한산을 또 갈라젖힐 길을 열겠다고 한다. 우이령 도로확장·포장공사가 계획중이고,수많은 시민들이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개발이고 누구를 위한 길인가. 길다운 길이란 자신의 골과 개울을 망가뜨리는 길이 아니다. 골과 굴과 개울을 얼마나 잘 보전하면서 효과적인 길을 낼 것인지를 생각하는게 오늘의 개발정책이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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