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보증기금 임금피크제 6개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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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이 깎였는데 섭섭함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명예퇴직한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걸 볼 때마다 임금피크제를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신용보증기금 A모(56)부장은 지난해 7월 지방 지점장에서 경기지역본부 채권추심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신보가 국내에서 처음 시작한 임금피크제의 첫번째 대상자다. 처음엔 적응이 쉽지 않았다. 수십명의 부하직원을 거느리던 그가 혼자서 기획부터 마무리까지 다 해내야 했다. 사내는 물론 업무차 만나는 외부인의 시선도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난 지금 그는 임금피크제에 만족하고 있다.

"소속된 직장이 있고 사회적 신분이 유지된다는 게 중요합니다. 명퇴한 사람의 자녀 결혼식에 가 보니 왜 그리 썰렁하던지."

외환위기 이후 거세게 불었던 명퇴바람의 대안으로 임금피크제가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6월 신용보증기금이 이 제도를 도입한 뒤 다른 기업들도 속속 도입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11월 대한전선이 제조업 가운데 처음으로 임금피크제를 시작했고, 이달 들어 산업은행과 대우조선해양이 뒤를 이었다. 국민은행 등 금융회사들과 일부 제조업체도 임금피크제를 놓고 노사가 협의를 진행 중이다. 임금피크제를 무리없이 정착시킨 신보의 경험이 기업과 근로자 모두에게 관심을 끄는 이유다.

노사합의서에 사인했던 남상종 전 노조위원장은 "첫 대상자 9명이 모두 정년까지 근무를 원한다"며 "중간에 퇴직한다는 불안감이 없어지자 회사의 분위기도 안정됐다"고 평가했다. 대상자가 주로 부서장들이다보니 이들에게 명퇴를 권유하던 상사나 눈치를 보던 부하직원들의 불안감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신보가 지난해 말 외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임직원과 가족 4백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직원의 72.7%와 가족의 54.6%가 임금피크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 명퇴보다는 임금피크제를 선택하겠다는 응답도 양쪽 모두 90%에 가까웠다.

<그래픽 참조>

절감된 인건비로 신규 고용을 창출한 것도 임금피크제의 효과다. 신보는 지난해 1백명을 신규 채용키로 했으나 임금피크제 적용자 1인당 연 3천7백만원의 인건비가 줄어 들어 60여명을 더 채용할 수 있었다. 신보는 올해 임금피크제 대상을 13명으로 잡고 있다.

?네가지 성공조건=우선 노사 간의 신뢰가 성공의 전제조건이다. 신보 배영식 이사장은 취임 직후부터 1년간 "조직과 개인이 한발씩만 양보하자"며 노조를 꾸준히 설득했다. 편법적인 인원정리나 임금삭감 수단으로 활용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던 노조도 정년보장이라는 실리를 선택했다. 신보에는 1995년부터 봄.가을마다 회사를 떠난 명퇴자들이 1백85명에 달한다. 양측 모두 인건비 부담과 고용 부담을 벗어나는 윈-윈(win-win)게임이라는 공감이 형성됐다.

임금피크제 적용자들에게 적합한 직무를 맡기는 것도 중요하다. '시간 때우기'나 '자리 만들기'식이어선 곤란하다. 신보는 계약직원들에게 맡겨오던 채권추심 업무와 변호사에게 맡기던 소액소송 업무를 이들에게 배정했다. 신보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신보는 올해 연수원 교수.신용조사서 감리역 등의 직무를 새로 개발할 계획이다.

대상자의 자존심을 배려하는 세심함도 빠뜨리면 곤란하다. 자리배치나 직함 등 사소한 변화도 당사자가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신보는 이들에게 지점장.부장 등 당시 직함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했다. 책상을 부서장에 준해 배치하고 개별 소파를 지급했다.

열심히 일한 대가를 보장하는 인센티브도 필수다. 신보는 성과가 좋은 직원들을 대상으로 정년 이후에도 최고 3년간 계약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옵션을 두고 있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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