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인간안보' 높이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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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스위스의 스키 휴양지 다보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경제포럼, 세칭 다보스포럼의 올해 주제는 '안보와 번영'이다. 냉전시대도 아닌데 웬 안보 타령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기야 이라크 전후 처리에다 자살테러, 게다가 북한 핵문제까지 겹쳐 지구촌에 바람 잘 날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나라가 안보 위협으로 전전긍긍하는 상황은 아니다.

여기서 안보는 군사적 의미를 넘어선 '인간안보'(human security)다. 인간다운 삶, 문명된 삶을 방해하는 모든 위해(危害)를 제거해 인류의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을 함께 도모하자는 의미다. 대량빈곤과 물부족, 환경파괴, 전염병 확산은 물론이고 금융불안과 부정직한 정책 및 기업관행에 따른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은 사실 테러와 전쟁 못지않게 지구촌의 안정된 삶과 지속적 번영을 위협한다.

다보스포럼의 창시자이자 집행의장인 클라우스 슈바브는 인간안보 없이는 세계경제가 성장을 지속해 나갈 수 없다며 지구촌의 안보와 번영에 가장 절실한 것이 '평화'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평화가 과연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평화이고, 그 종착지가 어디인지 하는 문제 역시 간단치 않다. 평화를 위해 전쟁과 자살테러를 서슴지 않고, 군사적 응징도 때론 평화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는 어느 한 강국이나 거대기업, 특정 비정부기구(NGO)들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달성될 수는 없다. 나라 안과 밖의 평화를 같이 보는 냉철한 이성과 열정적인 인간사랑을 바탕으로 지구촌의 각국 정부와 기업.시민단체들이 힘을 모을 때만이 평화는 기약된다.

다보스포럼은 '말의 잔치'로 비아냥 받아왔다. 각국 정부.기업.지식인.NGO 대표들이 세계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정체성 위기와 위험.위협.모순들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책임을 나눠 가지며 이해와 설득으로 공동번영으로 이끄는 '계몽된 지도력'(enlightened leadership)을 발휘할 때 비로소 '말잔치'를 뛰어넘을 수 있다. 그러려면 정부는 국민의 안전한 삶과 정책의 예측가능성을, 기업인들은 친환경적 기술.제품 개발을 통한 삶의 질 향상과 투명.공정한 기업관행을, NGO는 분별력과 책임있는 행동으로 공존공영의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인간안보는 우리 문제를 세계의 시각에서 보고, 세계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인식할 때 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한국군의 이라크 재건 참여는 이라크 사람들의 인간안보 증진에 대한 기여로 볼 수도 있다. 앞으로의 한.미동맹 역시 전통적인 군사안보의 틀을 넘어 인류의 보편가치를 지향하는 '인간안보동맹'으로 업그레이드를 시도해 볼 만도 하다.

평화는 곧 안정되고 예측가능한 삶이다. 정치적 혼란과 정책의 불안정성.불확실성은 나라 경제와 기업활동에 치명적이다. 세계경제가 좋아지는데도 유독 한국경제가 어려운 데는 정치적 혼란과 우리 사회의 예측불가능성 탓이 크다. 총선에 목을 매단 정치권, 이익집단들의 집단이기주의, 도덕적 해이도 아랑곳않는 인기영합적 정부의 틈바구니에서 경제주체들의 마음의 평화는 요원하다.

자주와 동맹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국외교, 보건 및 환경재해, 청년실업에다 '사오정', 부실한 사회안전망 등 우리의 인간안보는 도처에 구멍투성이다. 저들과 우리, 나라 안과 밖을 하나의 전체로 아우르며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 줄 '계몽된 리더십'만이 현재의 '리더십 불황'을 극복해낼 수 있다.

변상근 논설고문 겸 월간 NEXT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