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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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제1부 불타는 바다 길고 긴 겨울(25) 보퉁이를 번쩍 들어지게에 얹던 진달이가 송씨에게 말했다.
『저는 또 뭐 꽤나 무거운가 했지요.이건 뭐 지게에 얹고 뭐고도 없네요.』 『어따 이 녀석아.흰소리 말어.겨울 짐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녀.』 『누님 친정에 왔다 가는데 뭐 좀 바리바리 싸 보내시지 겨우 개나리 봇짐만 한게 이게 뭐예요,원.』『저 녀석이 이제 대가리 커졌다고 말도 아주 넙죽넙죽 잘도 하네.너도 인석아 금년 농사 자알 지어서 추수 끝내거든 장가들 생각이나 해.』 『털어 봐야 쭉정이 뿐인 농사,추수때까지 기다릴거나 뭐 있나요.색시만 있다면야 지금이라도 못 갈게 없지요.
』 『장가는 그래도 꽤나 가고 싶은 모양이네.그래,미투리 짚신짝도 짝이 있다는데 넌 어떤 각시를 얻고 싶은데?』 『코는 하나만 있으면 되고요,입도 하나면 돼요.눈이랑 귀만 두개 달렸으면 족하지요.오줌은 앉아서 누고요.』 『저놈이 저놈이… 이죽거리며 말하는 것 좀 봐.』 송씨가 웃고 은례는 못 들은 척 마당가로 걸어나갔다.삽작문 앞에서 은례는 몸을 돌려 마루 위에 서 있는 치규에게 허리를 굽혔다.치규가 말없이 손을 내저으며 어서 가라는 시늉을 했다.
보퉁이 하나를 진 진달이가 훌쩍 앞서 걸어나갔다.아이를 업고은례가 또 짐을 일 수는 없어서 진달이를 짐꾼으로 딸려보내는 것이다. 제삿날에나 쌀구경을 하는 판인데,그래도 어떻게 장만을해서 송씨는 인절미도 빚었고,강건너 동네에서 잡은 돼지고기도 얼려두었던 것을 함께 쌌다.마침 이웃에서 잡은 꿩이 있어서 그것도 만두 빚을때 쓰라고 함게 보따리를 만들었다.
삽작문을 나서서 은례와 송씨는 마을 밖으로 뻗어 있는 길을 걸어나갔다.
시집이라고는 해도 정이 들기엔 아직 먼 사람들이 아니던가.게다가 남편마저 없는 집안에 제일 손아랫 사람인 은례였다.그런 딸에게 저 어린 것이 그래도 많이 의지가 되리라는 생각을 송씨는 한다.여자 사는게 다 그렇지 않던가.부모 떠나 면 거기,미우니 곱니 해도 남편 있고,남편 뒤쪽으로 뻗어 있는 그 길을 또 이어서 오는 것이 자식이 아니던가.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뼈마디에 찬바람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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