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으로 무장한 「슈퍼미국」/이석우 국제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미국은 슈퍼 301조의 부활로 신세계질서란 힘을 바탕으로 한 패권주의라는 사실을 다시금 분명히 했다.
미국정부는 우루과이라운드(UR)가 타결된지 불과 석달만에 UR의 기본이념·협정들과 정면 배치되는 슈퍼 301조를 부활,세계무역질서의 안정보다 미국의 국익을 앞세웠다.
GATT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GATT 협정이나 지난해말 GATT 회원국들 사이에 체결된 분쟁해결 규칙 및 절차에 관한 협정,그리고 내년 출범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들은 모두 무역분쟁 발생시 다자간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같이 모든 GATT 회원국들간에 합의된 분쟁해결 방식을 도외시한 채 미국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최고 1백%의 보복관세까지 부과할 수 있는 악법을 부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슈퍼 301조가 UR나 GATT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4일 일본을 방문한 제프 가텐 미 상무부차관은 『슈퍼 301조는 GATT의 규정들과 상충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함으로써 국제적인 비난을 샀다.
피터 서덜랜드 GATT 사무총장은 슈퍼 301조 부활이 무역분쟁을 고조시킬 위협이 있다고 경고했으며 유럽연합(EU)측이 이 법안을 유럽에 대한 중대한 위험으로 간주하겠다고 밝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특별회의를 소집,미국의 해명을 요구했다. 우리나라도 슈퍼 301조에 의한 제재가 가해질 경우 GATT에 제소하겠다고 강도높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미국의 슈퍼 301조 부활이 GATT나 UR 규정들을 위반한 것으로 판명이 나더라도 미국을 제재하거나 슈퍼 301조를 무력화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강제력이나 구속력이 없는 GATT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조사위원회를 구성,미국측에 이 법안의 부활을 철회하도록 권고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것도 미국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다.
2차대전이후 냉전논리와 인권문제 등을 내세워 국제무대에서 주도권을 유지해온 미국이 이제는 냉전종식을 맞아 거의 노골적으로 스스로의 논리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이런 자세를 취하는 한 인권 등을 이유로 후진국에 압력을 가하는 것도 결국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허울좋은 명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