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아동 성폭력 피해자가 당하는 인권 유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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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경찰 과실로 성폭력 진술 녹화가 지워져 피해 아동이 사실을 재녹화했다면 이를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피해 아동이 악몽과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말하느라 겪었을 정신적 고통을 인정하고 경찰의 불법 책임을 엄하게 물은 것이다. 이에 앞서 17일 법원은 경남 밀양에서 발생한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의 피해자에 대해서도 경찰이 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경찰이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밀양의 물을 흐려놨다”고 모욕을 주고 공개된 장소에서 피의자를 세워 놓고 겁에 질린 피해자에게 범인을 지목하게 하는 등 인권 유린을 했다는 게 판결 이유였다.

경찰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인권 수준은 한마디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아동 성폭력 피해자와 부모들이 상담기관에 호소하는 수사 과정의 실태는 정말 놀랍다. 어른도 두렵고 떨리는 수사 환경에 어린이를 몰아넣고 어른의 용어로 육하원칙에 맞춰 얘기하라고 명령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보호해야 할 수사관이 오히려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피해자로 하여금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또 떠올리게 한다. 어린이의 말에 일관성이 없다며 증거로 인정하지 않거나 아예 증언 능력이 없다며 무시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 아동과 가족이 겪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당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이번 법원이 내린 판결은 이 같은 경찰의 인권 유린에 경고장을 낸 것이다. 앞으로 경찰은 성폭력 피해사건에서 인권 수사를 하지 않을 경우 줄줄이 배상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를 감당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아동의 언어·심리를 잘 이해하는 아동 성폭력 전담 수사관을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독일에서는 과학적 수사 기법을 동원해 진실 여부를 가려내는 아동진술분석법을 도입하고 있다. 아동의 진술이라고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수사기법은 반드시 도입해야 할 제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