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4부] 겨울 (12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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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아저씨가 전화를 받았다. 내 예상대로 엄마였다.

“호텔은 좋아?… 몸은 괜찮고?… 피곤하지 않게 잘해요.”
 
엄마와 말을 주고받는 아저씨의 말투를 보자 왠지 내 마음이 따뜻해 왔다. 두 사람은 그냥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해한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엄마가 아저씨를 두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를 한 번도 아프게 한 적이 없었어. 위녕, 믿을 수 있니? 엄마는 아저씨 때문에 사랑이란 꼭 아픈 게 아니란 걸 알게 된 거야. 맙소사, 그런데 아저씨는 말한다…. 예전에는 나도 여자들에게 많은 아픔을 준 사람이었다고.”

나는 그때 그게 상처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앞에서 서로 아주 일상적인 안부를 묻고 대답하는 두 사람은 커다랗고 노란 한 덩이의 전구처럼 느껴졌다. 따뜻한 빛과 열을 사방에 뿌리며 스스로도 밝고 따뜻한 그런 빛 말이다.

아저씨가 내게 전화를 건넸다.

“아저씨네 집에 갔다며?…”

내가 “어”하고 대답하자, 엄마는 “외할아버지 수술 잘 끝나셨대, 다행히 암이 퍼지지 않아서 장만 크게 잘라내신 모양이야. 그건 그렇고 제제가 학교를 안 갔다면서?”하고 물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얄미운 제제 생각이 났다.

“엄마 제제 혼내줘. 학교에 안 간 건 물론이고, 용돈으로 PC방 가서 다 쓰고, 저녁엔 반찬투정을 하며 떼를 쓰더니, 내가 야단을 치니까…, 나보고 ‘누나, 너네 집에 가’ 이러는 거 있지.”
 
마지막 말을 하고 있으려니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쇼를 하는구나. 버라이어티 쇼를 해.”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 줄 알아?”
 
엄마가 앞에 있었다면 나는 엄마 앞에서 눈물이라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은 내가 이곳을 정말 내 집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위녕, 엄마는 누가 나보고 너네 딸 엄청 못생겼네, 해도 화가 안 나.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니까. 엄마 말 알겠어? 그건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그냥 시끄러운 경적 소리 한번 들은 걸로 치는 거야. 알았다, 어쨌든 그건 엄마가 가서 혼내줄게, 마음 풀어…. 그리고 제제 말이야…. 엄마가 곰곰 생각해봤는데…. 그리고 아줌마들한테도 일러놨는데, 야단치지 마라. 그 어린 게 학교 가기 싫어서 어른들을 속이고 골목길에서 이리저리 헤맬 때, 얼마나 불안하고 마음이 아팠겠니? 엄마가 외국으로 떠난 게 무서워서 그런가 싶어 엄마 마음이 너무 아팠어. 그러니까 야단치지 말구. 잘해줘. 엄마가 혼낼까봐 전화를 받지 않기에, 막딸 아줌마에게도 말을 해 놓았는데, 학교 가기 싫으면 하루쯤 쉬라고 해. 너도 그럴 때가 있는 거잖아? 대신 엄마가 경찰서 갈 거라고 했어. 하루만 더 빠지면, 그러니까 빠지더라도 다음 학기에나 빠지라고, 아니면 엄마가 공항에서 경찰서로 간다고. 알았지?”

킥킥 웃음이 나왔다. 엄마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웃긴 이 녀석아 엄마 마음이 찢어지는데…. 글구 정말이야, 하루 학교 빠진다고 엄마가 경찰서에 가진 않지만 자꾸 빠지면 진짜 간다니까. 의무 교육이잖아.”

아무튼,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그걸로 제제를 위협할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고소했고, 그때 겁먹을 제제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때 창가에 서서 시가를 피우던 아저씨가 문득 나를 돌아보더니 손짓을 했다. 엄마의 한숨을 듣다 말고 일어나 아저씨네 창가로 가니까 뜻밖의 겨울 손님이 우리를 찾아오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엄마 눈 와. 첫눈이야!”

그러자 엄마가 갑자기 큰소리로 대꾸했다.

“위녕, 한국 가고 싶어…. 벌써 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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