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프라임 쓰나미' 왜 정부와 시장은 또 오판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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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금융시장에서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우려가 공론화된 것은 지난 3월초였다. 이때부터 우리 정부와 시장 전문가들은 이 사안이 국내 금융시장과 경제에 미칠 영향을 평가해 공표해왔다. 이들의 입장은 한결 같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의 영향은 크지 않고,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간단했다. 저신용 장기 주택담보 대출인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미국 모기지 시장의 5%, 전체 미 금융상품 가운데 1%도 채 안됐다. 무엇보다도 우리 금융기관들은 이 상품에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

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6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선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앞장섰다. 9일 서브프라임 부실 우려를 과소평가한 채, 한은은 사상 최초로 두 달 연속으로 금리를 올렸다. 때를 같이 하여 프랑스 최대 은행인 BNP파리바가 서브프라임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한 펀드의 환매를 중단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서브프라임 부실 우려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도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날 우리 증시는 코스피 지수 기준으로 80포인트, 4% 이상 폭락했다.

1주일 후 재정경제부가 거들었다. 한은과 다른 점은 서브프라임 부실 우려에 대한 은밀한 공포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16일 권오규 경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재경부 사내 게시판을 통해 ‘예기치 않은 충격으로 엔캐리 자금이 급격히 회수될 경우 1997년과 같은 외환 위기가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서브프라임 부실로 국제 금융시장에 자금이 고갈되면 국내에 투자한 일본 자금이 철수하고, 이 경우 금융시장에 충격이 닥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경제 관료들의 결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경고성 글이었다. 그러나 정부나 시장 전문가의 종래 전망과는 정반대인 경제 수장의 ‘비공식’ 견해가 전해지자, 시장은 갑작스럽게 애인의 변심을 맞은 청년처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하루 코스피 지수는 125P, 7% 이상 폭락했다. 단 하루만의 낙폭으로는 증시 역사상 최대였다. 이날 폭락 사태를 지켜본 한 애널리스트는 “정부나 시장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외환위기 때만큼이나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고 배신감을 토로했다.

◇하나의 뇌관에 달린 수많은 도화선

그렇다면 왜 우리 정부와 전문가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우려로 인한 현재의 금융 불안 상황을 오판했을까? 아직 사태가 완전히 마무리 되지 않았지만, 세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 국제 금융시장의 구조와 메카니즘에 대해서 여전히 잘 모르고 있었다. 현재의 국제 금융시장은 헤지펀드를 비롯한 사모 펀드 중심으로 재편됐다. 과거처럼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기관이 중심축이 아니다. 단기 수익률을 추구하는 펀드들은 연기가 피어오르기만 하면 초원을 냅다 달려 도망칠 궁리를 하는 영양 무리와도 같다. 미국 시장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부실화돼 국제적으로 돈줄이 마르게 되면, 많은 펀드들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신흥시장에서 자금을 회수한다. 특히 상대적으로 싼 금리 덕분에 신흥시장에 많이 유입된 일본 자금, 이른바 엔캐리 자금이 보다 안전한 자산을 찾아 나서게 마련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다양한 파생상품과 연관돼 있다는 점도 간과했다. 각종 펀드와 금융기관들은 직접적으로 이 모기지 상품을 구입하지 않았더라도, 파생상품을 통해 연결돼 있다. BNP파리바 은행의 펀드는 한 예일 뿐이다. 당초 예상과는 달리,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우려라는 뇌관과 연결된 도화선은 한 두 가닥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숱한 가닥이 칡뿌리처럼 뒤엉켜 있다. 눈에 띄는 한 줄기 도화선이 우리 곁을 지나치지 않는다고, 폭발에서 자유로울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둘째, 전세계적으로 돈이 너무 많이 풀렸고, 이로 인해 주식·부동산 등 자산 가격이 지나치게 뛰었다는 점을 망각했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대부분의 선진국과 신흥시장은 과다 유동성과 자산 거품에 시달려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그만 충격에도 거품이 큰 소리를 내며 터지게 마련이다. 이때 악재의 내용이나 강도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울려고 작정하고 있다면, 누가 얼마나 세게 때리든 엉엉 소리 내어 울게 마련이다.

◇버냉키는 그린스펀이 아니다

우리 정부와 시장 전문가의 오판 가운데 하나는 지난 20여년간 지속돼온 관성과 관련이 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국제적 금융 불안 상황을 비교적 잘 관리해왔다. 우리 정부와 시장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런 위기관리 능력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국제 금융시장에는 다양한 변고가 벌어졌다. 1987년의 블랙먼데이, 94년의 남미 외환위기, 97년의 동아시아 외환위기와 그 이듬해의 러시아 재정위기 등.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불길이 세계 경제의 심장부인 미국까지 강타하지는 않았다. 물론 87년 10월19일 블랙먼데이 단 하루 동안 미국 증시는 23%나 폭락했다. 그러나 그 영향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88년초 이 사태에 대한 공식적인 분석 보고서 77편이 모두 출간되기도 전에 시장은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고 반등했다. 그 주역은 국제 금융시장의 노련한 관리자였던 앨런 그린스펀 FRB 의장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1월부터는 FRB 신임 의장인 벤 버냉키가 그린스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는 지난 한해를 거의 말실수로 소일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우려로 인한 금융 불안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주말 미국과 유럽 금융시장을 진정시킨 FRB의 재할인율 전격 인하 조치 역시 버냉키의 작품은 아니다. FRB의 구세력들이 오히려 버냉키의 반대를 물리친 것으로 미국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동남아의 외환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다 위기를 자초했던 우리 정부는 미국발 금융 불안 시나리오를 과소평가하다 시장의 신뢰를 잃을 처지에 놓여있다. 우리 정부와 중앙은행의 다음 행보에 시장의 관심이 쏠려 있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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