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유전쟁] 37. 교육 목표 재정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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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민족사관고가 문을 연 1996년을 돌아보면 한 해를 10년처럼 살았던 것 같다.

모두 장학생으로 뽑은 첫 신입생 30명은 국내 최고 시설 속에서 역시 국내 최고 교사들에게서 배웠다. 그런데 1년도 안 돼 19명이 학교를 떠나고 11명만 남았다. 이 같은 참담한 결과를 놓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학부모들의 요구대로 당분간 전통.영재교육을 보류하고 서울대 진학을 교육 목표로 삼을 것인가. 이런 일이라면 교육 전문가도 아니고 학원 경영자도 아닌 내가 굳이 나설 일이 아니다. 민족사관고를 단번에 또 하나의 입시전문기관으로 전락시키고 말 것이다. 나의 평생 소원이 강원도 산골짜기에 고급 대입전문학교를 만들려는 것이었던가'. 어림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교내외에 선포했다.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은 민족사관고에 오지 마라."

그 무렵 외국 어느 조사기관이 세계의 대학 순위를 발표했다. 서울대는 8백등이었다. 우리나라 고교생 대부분이 세계 8백등 대학 진학에 매달린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라고 생각했다. 서울대를 안 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두 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우선 세계 10위권에 드는 외국 명문대로 가는 길을 개척하기로 했다. 서울대 대신 하버드.MIT.프린스턴.옥스퍼드대 등을 목표로 하는 학생을 받아들이겠다는 취지였다. 우리나라 대입제도의 영향을 안 받고 제대로 된 영재교육을 실시해 평생 연구할 과제를 갖고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그 길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다음으로 국내 대학에 진학할 경우 대학 이름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 분야를 가장 잘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 어디인가를 대학 선택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이 기준에 동의하는 학생만 민족사관고 입학을 허용할 계획이었다. 영재교육과 대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찾아낸 길이었다.

97년 제2기생이 입학하면서 나는 고심 끝에 새로운 수업 시간표를 만들었다. 첫해에는 내가 '독선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학부모들의 강력한 요구를 일부나마 반영하는 바람에 본격적인 영재교육을 실시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이 때문에 2기생부터는 재래식 교육에서 완전히 탈피해 창의성 향상에 중점을 두는 영재교육 프로그램을 정착시킬 계획이었다. 그리고 교사들 간 경쟁을 유도해 연구 지향 풍토를 조성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자기 계발과 연구를 소홀히 하는 교사는 민족사관고에서 살아남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이에 일부 교사들은 "학교가 시장이냐"며 불만을 드러내고 학교를 떠났다.

대신 교사들에게 쉴 수 있는 시간을 줬다. 학생도 1주일에 하루는 공부하지 않고 마음대로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첫해에는 1주일 내내 쉬는 날이 없었다. 학생들에게 고아원.양로원을 찾아가 불우 이웃을 돕도록 했다. 또 문화재 탐방을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깨닫게 했다. 이렇게 해 민족사관고는 영재교육과 민족교육이라는 두 가지 이념을 융화시키면서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최명재 파스퇴르유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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