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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음사기와 은행장 문책(사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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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장영자씨 어음사기사건의 관련 금융기관들의 실명제 위반으로 비화됨에 따라 결국 대규모 징계인사를 불러왔다. 신용의 상징인 금융기관이 버젓이 위법해 실명제 정신에 역행한 것이 강성징계의 사유다.
그러나 문제가 된 동화은행이나 서울신탁은행은 명색이 민영화된 시중은행이고,특히 두곳의 은행장은 임기를 맡은지 별로 오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들이 은행장으로서 감독소홀에 대한 책임이 있고,그에 대한 응분의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래도 정부가 앞장서서 사퇴를 시키는 수순을 지켜보면서 일말의 아쉬움을 갖게 된다.
재무부는 은행장들을 사퇴시키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자진사퇴 형식을 취했으나 누가 봐도 자율적 인사라기 보다는 타율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바로 이점이 문제인 것이다. 금융기관들이 장영자씨의 어처구니없는 사기극에 동참해 실명제를 위반했다면 대책도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금융관행과 실명제를 보완하는데 초점이 모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은행장 강경징계 방침은 사건을 조기 수습하는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금융자율화를 제대로 정착시키는데는 부작용도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사태의 교훈중 하나는 실명제가 긴급명령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위반사례에 대한 처벌범위와 내용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과태료만 물게 돼있는 긴급명령조항을 보완하는 대체입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처벌할 규정이 마땅치 않아 은행장을 강제사퇴시키는 일이 다시 일어나선 안될 것이다.
시중은행장들이 금융스캔들에 휘말려 물러나는 것은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문제를 생각할 때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또 잦은 은행장 경질은 해당은행뿐 아니라 금융계 전체를 봐서도 불행한 일이다.
금융사고를 막을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사전적인 예방이며,그것도 금융기관 내부의 자체내규와 관행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밖에서 아무리 제도를 엄하게 정해놓고 사후감독을 한다해도 항상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식이 되기 쉽다. 금융기관의 자율화와 금융기관간의 건전한 경쟁풍토를 만들자는 궁극적인 취지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선 점포에서의 지나친 자금조성경쟁이 시정돼야 하고,실명제 후에도 크게 위축되지 않고 있는 사채시장이 제도권으로 정상화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용금고가 정상화돼 영업범위도 커지고,대금업 신설을 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정부는 금융사고가 실명제가 정착돼가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읽고 제도를 보완해가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금융기관들도 정부의 메시지를 정확히 받아들여 필요이상으로 위축되지 말고,그러나 한층 긴장된 모습으로 추락한 신뢰를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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