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이·장사건과 실명제(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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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부도 사기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일부 금융기관들이 금융실명거래제를 위반한 것으로 밝혀졌다. 우선 은행감독원이 1차로 확인한 곳만도 동화은행 등 세군데나 된다.
개혁중의 개혁이라는 실명제가 금융거래의 투명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의 건전한 금융풍토는 기초부터 흔들리게 된다. 거기다 실명제 위반의 원인이 금융기관들이 제규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옛날 관행에 젖은 타성 때문이라면 금융개혁은 더욱 요원하다.
은행감독원에 따르면 이들 금융기관들은 동일인 지급한도를 어기며 부당대출을 했고,폐업한 기업에 어음·수표용지를 다량 교부했다. 또 양도성 정기예금증서의 거래와 부금통장 작성을 차명·도명으로 했다. 이것은 장씨가 적극적으로 주도한 위반사례지만 금융기관들이 이에 협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때문에 사기사건의 동기와 진상 못지않게 금융기관의 규정위반과 기강해이를 규명,적출하는 일이 급해졌다. 실명제가 위반되고 때론 무시된 흔적까지 보이는 것은 충격적이며,금융기관 종사자들의 정신자세가 이렇다면 실명제가 내건 온갖 명분은 허구가 될 수 밖에 없다. 검찰이나 은행감독원은 사기적 측면 못지 않게 이 부분을 밝혀내는데 전력해야 할 것이다.
당국은 실명제가 실시되면 비실명 금융거래가 없어짐으로써 비정상적 거래나 이른바 돈세탁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그게 아닌 것 같다.
또 일정액 이상의 인출 등 자금이동은 국세청의 특별관리를 받게 돼 있는데 아직도 가명·차명이 가능하다면 이런 규정들은 무력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밝혀진 것만해도 이 정도니 밝혀지지 않은 것까지 생각하면 비실명 금융거래의 크기가 어느정도나 될지 두렵다.
이번 제2의 이·장 사건은 사기가 가능한 금융풍토가 온존하고 있다는 점을 만천하에 드러내준 것이다. 이·장 부부가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재기해 보려고 결심했고,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은 원인은 바로 금융계 내부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실명제가 실시되고 5개월이 지났는데 아직 이 제도의 정착여부에 관한 대국민적 보고가 없다. 과연 검은 돈의 거래는 일절 봉쇄됐으며 모든 금융거래가 변화와 개혁의 밑바탕이 될 만큼 정상화됐는지 일반 국민은 모르고 있다.
사채거래는 아직도 성행하는 것 같고,이번 사건에서처럼 금융기관 스스로 실명제 준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실명제 운용에 허점이 많은 것이 아닌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실명제가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지 전면 점검해 손질할 것은 손질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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