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사람의 죽음(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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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1963년 8월13일 당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대장은 한 일선사단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갖고 인사말을 통해 『이 땅에서 다시는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로서는 여러가지 감회가 있을 수 있었겠지만 그의 술회대로 그가 과연 「불행한 군인」이었는가에 대해서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79년 10월26일 비명으로 숨지기까지 그는 줄곧 이 땅의 최고통치자로 군림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하다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사람은 누구나 그가 해온 일이 성공이었는지 실패였는지,혹은 그동안의 삶이 행복한 것이었는지 불행한 것이었는지를 곰곰 되씹어보게 마련이다. 스스로의 평가와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지만 죽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이 영이었던 욕이었든 한낱 물거품에 불과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하루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정일권씨와 문익환씨는 나이로 한살 터울인데다 너무 대조적이고 상반된 삶을 살아왔다는 점에서 묘한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우선 정씨는 불과 33세의 젊은 나이에 육·해·공 3군 총사령관을 지낸 것을 필두로 국회의장·국무총리·외무장관·주요국 대사를 두루 거친 것이 이 땅의 가장 화려한 경력소유자였던 반면 문씨는 시를 쓰는 목사며 재야운동가로서 6차례에 걸쳐 모두 9년6개월이라는 긴 세월을 철창속에서 보내야했던 고난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사뭇 대조적이다. 한사람이 외국에서 오랫동안 병고에 시달리다가 운명한데 비해 다른 한사람은 갑자기 자택에서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뒀다는 점도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왔느냐 불행한 삶을 살아왔느냐,혹은 그들이 이 땅에서 해온 일이 성공이었느냐 실패였느냐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자신있게 장담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의 죽음을 맞게 된 이 시점에서는 그들의 영욕이나 공과를 따지는 일조차 부질없는 일처럼 보인다. 죽음을 역설적으로 미화시킨 이탈리아 피사마을의 벽화 제목처럼 「죽음의 승리」라고나 해야할까. 그분들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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