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볼만한문화유적지>여주 고달사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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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驪州의 옛이름은 驪江이다.남한강의 큰 물줄기가 가로지르고 있어 그런 이름이 생겼던 모양이다.들이 넓고 산세가 아기자기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유명했다.남한강은 그 흐름이 유유하다.그래서 일찍부터 뱃길이 열려 있었다.
영월에서 출발한 배가 서울까지 오는데 이틀이면 되었다니 걸어다니던 시절로는 대단한 것이었다.더구나 많은 물자를 운반하는데는 이보다 더 훌륭한 운송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이 뱃길에서 여주 신륵사의 塼塔은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한다.강가에 우뚝선 7층탑이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면 힘든 코스가 다 끝났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그래서 벽돌로 만든 탑 때문에 신륵사를 벽절(벽寺)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高達寺는 大刹이었던 모양이다.웅장했을 건물들은 간데없고 남아있는 것은 石造物들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절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국보4호로 지정된 浮屠를 비롯해 元宗大師眞塔(보물7호)과 그塔碑(보물6호),그리고 거대한 石造佛像臺座(보물8호)등의 지정문화재가 있고,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주춧돌.기단석 등과 함께 깨진 기와조각들이 무수히 많다.
浮屠는 법 높으신 스님이 입적하시게 되면 茶毘(佛敎의 火葬)를 하고 舍利 또는 유골을 모시는 일종의 墓塔이다.高達寺에 있는,주인을 알수 없는 부도와 元宗大師의 두 浮屠는 고려초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팔각형 평면을 기본으로 한 이부도 들은 규모도큰편에 속하지만 기단부분에 雲龍으로 힘차게 장식한 竿石이라든지,연꽃을 부드럽게 조각한 蓮華臺石,그리고 화려한 옥개석(지붕돌)등 모두 당대 제일의 石手가 동원된듯 솜씨가 일품이다.
浮屠를 건립할 때에는 그분의 일대기를 비석에 새겨 세우게 마련이다.이것을 塔碑라 하는데 元宗大師의 탑비 역시 대단한 작품으로 글자를 새긴 碑身은 깨져 현재 경복궁에 옮겨져 있으나 비신을 받치는 龜趺(거북 모습의 받침돌)와 리首(비 신의 뚜껑돌로 대개 아홉마리의 이무기를 새기고 있음)는 현장에 잘 남아있다.그 모습이 하도 우람하면서도 살아있는듯해 보는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거대한 鐵佛이 앉아계셨음직 한 불상대좌는 상하를 연꽃으로 장식하고 있다.바로 蓮華臺니 부처님의 자리임을 뜻한다.그리고 이불상대좌가 자리한 곳이 이 사찰의 金堂이 세워졌던 터인 것이다. 高達寺址는 여주에서 남한강을 건너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원주가는 길로 우회전한다.
2㎞쯤에서 다시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서 지평가는 길로 10㎞정도 더 가게되면 상교리의 입구가 된다.高達寺는 바로 상교리 뒷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高達寺를 보고 나오는 길에 신륵사에들르면 적당하다.신륵사에는 祖師堂(보물180호) .多層石塔(보물225호).多層塼塔(보물226호).보제존자사리탑(보물228호)등이 있고 강변의 풍치 또한 시원하다.
그리고 世宗의 英陵과 孝宗의 寧陵도 가까이 있어 쉽게 들러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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