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본 한국(문창극 전 워싱턴특파원 귀국보고: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법/제대로 만들때 제대로 지킨다/현실 안맞는 법준수 강요는 무리/정치적 판단이 우선되면 부작용
미국처럼 「법」이란 단어를 자주 볼 수 있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안전벨트를 매시오. 이것은 법입니다』 『주법은 고속도로에 물건을 버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보호구역의 주행속도 25마일은 주법입니다』…. 이렇게 법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미국인들이 법에 대해서만은 절대적인 신뢰를 하기 때문이다.
법집행자는 법의 집행에 가차가 없으며 국민들도 이 법집행자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인정한다.
미국처럼 자유스러운 나라도 없다. 단 법의 한도내에서이다.
미국의 흑백 차별주의자들의 모임인 KKK단원들이 영화에서 보는 백두건을 쓰고 『흑인들과 같이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없다』는 구호를 외치며 백악관과 의회 앞을 버젓하게 시위한다.
흑인도시인 워싱턴에서 흑인들이 이들을 그냥 두려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워싱턴 당국은 흑인들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1백만달러의 경비를 들이기도 한다.
반면 이러한 시위가 본래 신고했던 지역을 넘거나 일탈된 행동으로 나왔을 경우는 경찰들이 가차없이 무자비할 정도로 다룬다.
지난 70년대 미국 대학에서 월남전에 대한 반전시위가 폭력으로 변했을 때 주정부는 가차없이 발포명령을 내려 수십명이 죽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포명령이 정치문제화되지 않는다. 법대로 집행됐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대로에서 경찰의 목덜미를 잡고 시비하는 일은 있을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법이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법에 대한 관심이 높다. 미국의 국회의사당과 마주보는 대법원 앞에는 시위가 끊이질 않는다.
대법원에서 결론이 나면 그 판례가 하나의 법이 되어 그후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에 대법원의 판결 전까지 여론을 반영하자는 의도에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법관이 누가 되느냐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민주당의 케네디 대통령때 대법관으로 임명된 흑인 마샬 대법관은 나이가 80이 넘었는데도 은퇴를 하지 못한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은퇴할 경우 당시 공화당인 부시 대통령이 보수적인 대법관을 임명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법관 한명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대법관의 진보대 보수의 구성비가 달라지며 이에 따라 판례의 성격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 때문이다.
우리는 대법관들의 변화에 미국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특히 대상자의 성향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고 할 수 있다. 법은 법이고 중요한건 따로 있다는 인식 때문은 아닐까.
부시 대통령과 함께 걸프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콜린 파월 합참의장은 클린턴 대통령과 정책상 잦은 마찰을 빚었다. 파월은 부시 행정부의 국방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려 했으며 군대내의 동성연애자에 대한 처리로 클린턴 대통령과 달랐다. 우리 같으면 당장 교체됐을 것이고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됐을 것이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출범후 근 9개월을 이러한 알력을 가지고 끌어갔다.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법이 보장한 그의 임기를 준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임기가 있건 말건 정치적 판단으로 자리를 바꾸는 우리와는 다르다.
요즘 서울은 개혁바람에 공무원들이 『법대로 하자』는 것이 유행이라고 한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 법에 문제가 있다. 현실에 맞지 않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지킬 수가 없는데 법대로 하자니 고달픈 것은 국민들뿐이다. 법을 존중하자면 우선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법이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 그후 냉혹한 집행이 순서고 순리다.
정치권에서 나오는 개혁입법도 이러한 원칙이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