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실시3개월>4.은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30억원 정도의 금융자산을 굴리던 金모씨(55)는 실명제 직후 큰 고민에 빠졌다.2억.3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에 집중 투자하고 있었는데,「5천만원 이상 국세청 통보」라는 실명제의 규정이 아무래도「자금 추적 가능성」이라는 두 려움을 주기때문이었다.
그는 CD의 만기가 되는 대로 일단 1천만원,2천만원등 소액으로 쪼개기 시작했다.본인 명의는 물론 친척,가깝게 지내는 친구등 8명의 이름을 동원하고 그들의 연간 소득을 감안해 나누었다. 그는 96년 금융자산 종합과세가 시행되기 전까지 이렇게 소액으로 쪼개 여러 곳에 예금해 놓으면 종합과세를 너끈히 피해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이제는 느긋한 입장이다.
「현찰 선호-뭉칫돈 이탈-예금쪼개기」로 특징 지어지는 실명제이후의 뒤틀린 자금시장 구조는 이렇듯 금융기관 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하다.특히 상가와 기업들이 몰려있는지역의 은행 지점에선 요즘 걸핏하면「현금 非常 」이 걸린다.그저 한번 있을 법하다고 보아 넘길 일이 아니게 사정이 매우 심각하다. 갑자기 어떤 고객이 불쑥 찾아와 몇 천만원의 예금을 1만원짜리 현금으로 찾아가거나 다른 은행으로 쪼개 옮기겠다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하도 시달려 지난 달부터 지점에 보유하고 있는 時在金을 1억원에서 2억원으로 올렸습니다.그런데도 여전히 현금이 모자라는경우가 많아 본점 영업부에 지원을 요청하거나 다른 지점에 가 얻어옵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고객들의 예금인출 요구를 도대체 가늠할 수 없다는 B은행 종로 5가 지점 대출 담당 차장의푸념이다.
이 때문에 실명제 이전 6백억~8백억원이었던 대형 시중은행의時在金은 실명제이후 평균 8백억~1천5백억원으로 늘어났다.
시재금이란 은행들이 고객의 예금 인출 요구에 대비해 현금으로금고안에 넣어두는 돈이다.따라서 은행 입장에서 보면 시재금 증액은 그만큼 자금운용에 제약을 준다.
더욱이 현금이 많이 굴러다니는 시장 주변이나 강남의 주요 지점에는 아직도 예금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예금을 했다가 나중에 자금추적과 함께 많은 세금을추징당할 까봐 여전히 예금하기를 꺼리는 것 같습니다.들어오는 예금도 대부분 금리가 높은 신탁상품으로 몰립니다.』 C은행 압구정동지점의 예금액은 8월12일 5백20억원에서 10월말 현재5백50억원으로 5.7% 늘어나긴 했다.그러나 문제는 이 지점의 예금 증가율이 이 은행 전체 예금 증가율(9.6%)의 절반수준이라는 데 있다.지점으로서는 보 통「피가 마를」일이 아니다. 추석자금으로 풀린 현금통화는 대부분 환수됐다고 하지만 시중에는 여전히 현금이 많다.현금통화와 은행의 시재금을 합친 화폐발행 잔액은 지난 9일 현재 12조1백87억원으로 지난해 같은날(8조3천2백18억원)에 비해 44.4%가 늘 어나 있는 상태다.많이 환수됐다는 것이 이 지경인 것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장사 규모가 노출될까봐,혹은 금융 자산이 드러날까봐 걱정하면서 현금을 움켜쥐고 있는 셈이다.
〈梁在燦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