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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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허만하(1932~)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전문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모스크바의 차이코프스키 국립음악원에 들렀을 때 우연히 한 교수의 피아노 레슨을 참관할 수 있었다. 두 명의 학생에게 같은 곡을 지도하는 중이었는데 문외한의 눈에도 다르게 지도하는 것이었다. 쉬는 시간에 내가 물었다. 왜 같은 곡을 다르게 연주하는가. 그가 답했다. 학생들은 성장배경이 다르고, 교육 정도, 좋아하는 그림.음악, 성격도 다 다르다. 각기 다른 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곡의 해석을 하고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빛깔로 연주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나의 임무다. 열 명의 학생이 같은 악보를 보며 각기 다른 열 곡의 쇼팽에 몰입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침햇살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 시의 감상 또한 당연히 그럴 것이다.

곽재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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