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없어 연발 일삼는 러시아기(특파원 코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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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0시간 늦는것은 “애교”… 툭하면 결항/행사 참가하려던 한국대사도 곤욕
비행기로 장시간 여행하는 것처럼 따분하고 지루한 여행도 별로 없다지만 구 소련지역에서 비행기로 여행하는 사람은 한가지 고통을 더 겪어야 한다.
제시간에 출발하는 법이 거의 없어 언제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몇시간 정도의 연착은 애교라고나 해야할 정도다.
출발시간이나 도착시간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10시간 이상씩 늦기 일쑤고 결항도 아주 잦다. 더구나 출발 몇시간전에야 비행기가 취소됐다고 발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때문에 중요한 일정을 정해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출장갈 경우엔 출발과 도착시간을 여유있게 정하지 않으면 일정을 망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지난달 30일엔 러시아 아에로플로트 여객기들의 「일상적인 연착」이 연속되는 바람에 대한항공(KAL) 007기 참사 10주년 행사에 참석하려했던 김석규 주러시아 대사가 24시간동안 공항 2곳을 네번씩이나 왔다갔다하면 시간을 허비한 후 지칠대로 지친 상태에서 겨우 사할린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일이 있었다.
김 대사가 원래 탈 예정이던 비행기 출발시간은 30일 오후 5시.
그러나 김 대사는 비행기가 조금 연착되겠다는 안내를 믿고 도모제도보 공항과 브누코보 공항을 네번씩이나 왕복하다 31일 오후 2시30분에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사할린까지는 모두 13시간이 소요되고 사할린에서 대한항공 사건 추모식이 열리는 네벨스크까지는 다시 자동차로 몇시간 거리에 있어 김 대사가 1일로 예정된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예정에도 없는 헬기를 동원하는 소동을 벌여야만 했다.
그나마 김 대사의 경우는 그런대로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31일 출발하는 블라디보스토크행 비행기를 타려던 한국인 김씨는 더욱 황당한 경우를 당했다.
김씨는 몇차례의 연발착 경험을 했기 때문에 공항에 오기전,공항에 도착한후,그리고 비행기의 보딩이 시작되기 전까지 수차례에 걸쳐 확인을 하고 환송나온 친지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김씨가 표를 내밀고 좌석권을 받으려하자 공항직원은 김씨의 표는 맞지만 지금 출발하는 비행기는 오늘 비행기가 아니라 어제 연착한 비행기고 김씨가 타야할 비행기는 다음달 저녁에 출발한다며 좌석권을 내줄 수 없다고 버텼다.
당황한 김씨는 하소연도 해보고 나중에는 돈으로 매수도 해보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김씨는 몇시간 동안이나 씨름한 끝에 11시간30분을 기다려야 탈 수 있는 비행기 좌석권을 구할 수 있었다. 이 비행기 역시 전날 연착한 비행기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밤의 쌀쌀한 공항에서 쪼그리고 앉아 뜬눈으로 밤을 새운 김씨는 부러워하는 다른 승객들을 뒤로한채 망쳐진 일정을 걱정하며 새벽공기 속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러시아 여객기들의 이같은 상황은 연료를 제때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석유수출국인 나라에서 비행기연료가 부족하다는 사실은 러시아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는 구 소련몰락후 엉망이 된 국가관리체제를 보여주는 많은 사례들중 하나에 불과하다.<모스크바=김석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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