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의 후추 8백섬(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중국 원왕조시대의 유능한 청백리 장양호가 쓴 『위정삼부서』에는 당나라 재상 원재의 얘기가 나온다. 원재는 자기집에 후추를 8백섬이나 저장할 정도로 재산에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은 자살의 형식을 갖춘 형벌을 당한다.
당시 후추는 서역에서 들여오는 귀중품이었다. 장양호는 이 얘기끝에 촌평하기를 『사람은 1백세까지 살 수 있으나 하늘에서 내린 생명은 80∼90세에 불과하다.
가령 90세까지 산다 해도 입지한 후의 기간으로 따지면 고작 30∼40년 정도에 그친다. 도대체 그 기간에 8백섬이나 되는 후추를 다 먹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재산에 대한 탐욕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일깨우려 하고 있다.
그는 「이」와 「의」가 양립할 수 없는 까닭은 의를 지키려면 이에서 멀어지고,이를 중시하면 의가 소홀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가지도층에 속하는 공직자들은 국사를 맡는다는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재물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는 경고다.
고위공직자의 재산공개로 상당수의 공직자가 그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재산이 많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부정축재 혐의를 받는 공직자들 가운데 일부는 실사를 받기도 전에 자리를 내놓고 물러났다. 어떤 법관은 그런 혐의가 억울하다 해서 재판정에서 난데 없는 신상발언을 통해 자기 재산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해프닝을 벌여 화제가 되고 있다. 또 몇몇 지방의회 의원들은 재산공개 자체를 거부하면서 사표를 내던져버렸다.
장양호의 표현을 빌리면 첫째 경우는 의에 충실치 모시했던 자기에 대한 참회로,마지막의 경우는 의보다는 이를 선택하겠다는 단순한 경우로 비쳐진다. 두번째 경우가 좀 어색하다. 자기 재산의 축적에 한점 부끄려움이 없다면 그건 실서과정에서 증거를 가지고 당당히 밝힐 일이지 변명을 허둥지둥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부와 명예를 다 갖겠다는 욕심이다. 이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어디 고위공직자들 뿐이겠는가. 더 많고,더 부정한 과정으로 축재한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들은 이만을 탐했고 명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탈이 적을 뿐이다. 후추 8백섬을 지녔다 해도 재상이 아니었다면 원재는 90세까지 잘 먹고 잘 살았을지 모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