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의 국립극단 확 달라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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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부 없어지니까 더 고달파요!".

13일 오전 8시50분. 고개가 가파른 서울 남산 국립극장 입구는 '중고등학교 정문'을 연상케 했다. "이러다 지각하겠다""빨리 빨리 가!"라며 서너명이 종종 걸음이다. 다름 아닌 국립극단 단원들이다. 예전의 '공무원'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손목시계를 보며 달리던 이들이 해오름극장을 돌아서 연습실로 들어갔다. 이미 30명의 단원이 책상 앞에 다닥다닥 앉아있다. 정각 9시, 수업이 시작됐다. '연극단원의 영어회화 수업'이라니. 꽤나 낯선 풍경이다. 강사가 지명한 한 단원은 "마이 네임 이즈…"라고 더듬더듬 자기 소개를 했다.

영어수업을 끝낸 이들은 숨돌릴 틈도 없이 요가수업을 받았다. 또 11시부터는 대학원 석사과정인 '한국공연 예술사'와 '체험적 연기론'등의 이론 수업. 이 모두가 평가대상이기에 교실에는 긴장감이 꽉 차 있다. 느지막히 연습실에 나와 공무원처럼 출근부에 도장을 찍던 예전 풍경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연극 경력 35년째인 김재건(57)단원은 "내 인생에서 정시 출근은 요즘이 처음"이라며 "배우에겐 쉬지 않고 걷는 것이 생명인데 힘들지만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변화의 핵심에는 국립극단 이윤택(51.사진) 예술감독이 있다. 불과 2주 전에 부임한 이감독은 극단 분위기를 확 뒤집어 놓았다. 맨 먼저 출근부부터 없애버렸다. 대신 교육일지와 연습일지를 만들었다. 단원들이 "분위기는 자유로워졌지만 연습강도는 더 높아졌다"며 "출근부가 낫겠다"고 엄살을 피울 정도다.

이감독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13일 국립극장 신년간담회에서 "195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4시간짜리 창작극 '뇌우' 등을 되살려 내겠다"며 "한국 연극의 정체성을 되찾는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두꺼운 대본을 처음 본 단원들은 전화번호부로 착각하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또 사라져가는 근대 공연물인 '동춘 서커스'도 무대에서 부활시킬 계획이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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