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흐름 정상화가 관건(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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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금융실명제의 첫 충격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으나 정부는 아직도 경제운용의 기본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그 근본 이유는 이번 조치가 지나치게 과거를 묻겠다는 응징적인 측면이 강조된 때문이다. 물론 가명과 차명이 부정부패와 불합리한 치부의 수단이 되어 왔던 점은 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의 혈관을 이루는 자금순환이 잘 안돼 경제가 제대로 안 돌아가선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을 범할 우려가 있다.
금융실명화 이후의 정부대책은 너무 표면적으로 나타난 문제점을 대증적으로 수습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식시장이 폭락하니 기관투자가에게 돈을 지원해 매수케한다든지,중소기업에 특별히 자금을 지원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중소기업만 따로 떨어져 활동하고 독자적인 자금시장을 갖고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주식시장이 경제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다. 주식시장을 살리려면 경제가 충격에서 벗어나 정상을 되찾아야 한다. 따러서 실명제의 충격을 줄여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는데 대책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우리가 정부에 요구하고 싶은 것은 바로 경제논리에 충실한 안목을 가져 달라는 것이다. 경제논리를 주장하는 것과 반개혁논리를 단선적으로 연결하는 위험을 경계할 때다.
자금의 흐름을 정상화시키자면 자금을 공급하려는 측과 자금을 쓰려는 측 모두를 살펴야 한다. 여기에는 동시에 이같은 자금수급을 중개하는 금융기관의 기능정상화가 자리잡고 있다. 자금을 공급하는 사람들을 저축의 형태로 금융기관에 맡기는데 이번 조치가 이같은 저축심리를 상당히 위축시키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단순한 교환경제에 비해 효율적이며 영동성을 갖는 기본 이유는 생산요소,특히 자금이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한 많이 흘러다니는데 있다. 즉 우회도를 높이는데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정부가 사회개혁의 필요성과 자금흐르의 정상화라는 두가지 요체에 관한 균형감각을 회복하기를 기대한다. 즉 과거의 비정상적인 금융관행을 치죄한다는 측면보다 어떻게 하면이 자금을 정상적인 자금흐름의 순환과정에 흡수시킬 것인가를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런 현실적 조처들을 실명제의 완화나 후퇴로 생각해선 곤란하다. 가명과 차명 등을 실명화하는 시행과정에서 장기채권을 발행해 일정한 유예기간을 주든가,기업 비실명 자금을 생산자금으로 유도해 어떻게든 자금이 생산과정내에서 흐르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과거를 묻는 여지를 꼭 필요한데 국한시키라는 것이다. 시중에서는 이번 조치로 물꼬막기가 충분치 못하면 화폐개혁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이는 경제의 기본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불성설이다.
어차피 앞으로는 실명이 아니고는 모든거래가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금융실명제의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첫 걸음은 자금 순환을 하루 속히 정상화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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