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풀이되는 짜맞추기 「화성수사」/이상열 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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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의 일부 범행사실을 시인했던 김모씨(41·노동·수원시 권선구 매탄동)가 경찰에서 풀려나자마자 자신의 자백은 강압수사와 가족들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에 따른 허위자백이었다며 범행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나서 「비과학적」인 경찰수사가 또 다시 문제가 되고 있다.
「물증없는 자백→번복→무혐의처리」라는 화성사건 수사의 기존양상을 그대로 보여준 이번 수사는 수사 착수부터 과욕에 따른 비상식적 「꿰어맞추기식 수사」로 이같은 결과가 예상됐었다.
지난달 초순 수사에 착수한 서대문경찰서의 수사발표를 보면 당시의 사건기록조차 검토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12일 김씨의 자술서를 공개하고 『범인이 아니면 이토록 자세한 진술을 할 수 없다』며 김씨가 진범임을 단정했으나 김씨의 상세한 진술은 당시 시체상황 등 중요부분에서 어긋나고 있기 때문이다. 강도로 위장키 위해 농수로에 버렸다고 김씨가 진술했다는 4차 사건의 피해자 이모씨(당시 23세)의 시계는 이씨가 차고 있었으며 사건 이틀후 가족들에게 인계된 것이 확인됐다.
『진범임을 확신할 수 없어 상부에 보고는 물론 수사본부에 공조수사 협조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서대문경찰서는 수사본부가 과학적인 증거가 아니라며 채택하지 않은 용의점만으로 김씨를 연행해 거짓말탐지기 반응을 시도했다.
경찰은 국과수의 정밀분석 결과 나온 범인의 혈액형·사인 등 과학적 자료에 근거해 범행의 물적증거를 찾는 노력은 등한시 한채 김씨를 수차례에 걸쳐 연행,철야 심문하는 등 용의자의 자백에만 의존하는 수사에 집착했다.
경찰이 이번 수사에서 보여준 ▲한 재미교포(47)의 영적 계시라는 주장에 의한 수사착수 ▲공조수사를 외면함에 따른 수사기록 검토 부족 ▲증거능력 없는 거짓말 탐지기 양성반응에 근거한 강압과 회유 등은 경찰이 아직도 「인권」과 「과학적 수사」보다 「실적」에 급급함을 입증한다.
『사건을 해결해 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래주는 것이 수사에 임하는 심정』이라는 수사간부의 말이 진실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물증이나 객관적 증거없이 시민을 연행하고 자백을 강요하는 등의 인권침해는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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