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1년 조선족 처녀와 가록 하동 이문옥씨|"아들도 낳고 부러운 것 없이 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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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91년 7월7일 색시감을 찾아 중국 심양시로 맞선을 보러 떠났던 한국의 농촌 총각 19명.
참한 색시 만나 예쁜 아기 낳고 오순도순 살려는 평범한 소망이 이 땅에서 좌절되자 수교도 되지 않은 중국까지 날아가야 했던 이들 총각들 중 10명은 이제 남부러울 것이 없다.
그들은 이역 땅이기는 하지만 얼굴 생김과 뿌리가 같은 조선족 처녀를 만나 소망을 이루게 된 것.
경남 하동군 하동읍 횡천면 남산리 원곡마을에 사는 이문옥씨(32)도 그 중의 한 사람. 진주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여 달린 후 다시 뜨막한 버스를 갈아타고 20여분간 들어가야 하는 이곳으로 향하는 차안은 모두 60∼80대 노인들로 가득 차 「젊음이 떠나간 마을」임을 한눈에 느끼게 했다.
『사귀었던 여성들이 모두 떠난 국졸 학력의 가난한 농군』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이씨는 지난해 동그스름한 얼굴에 보조개가 귀여운 중국 길림성 처녀를 아내로 맞아 올해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자 힘이 솟는다고 했다. 색시감이 한국에 오기 몇 달 전 봉당 한켠에 한칸짜리 신방을 새로 지은 후 침대와 장롱·가전제품들을 모두 사놓고 결혼 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는 그는 요즘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내를 위해 읍내에서 『협객행』등의 중국 무협 비디오테이프를 잔뜩 빌려놓았다.
이씨는 아내가 한국말도 서투르고 문화적 차이도 느끼긴 하지만 그 어느 여성보다 순종적이고 가정을 일으켜보려는 욕심도 많다며 매우 흡족해 하는 듯했다. 이씨의 어머니 김두례씨(71)는 『며느리가 김치도 못 담그고 여러 가지가 다 서투르지만 살살 가르치고 있다』면서 결혼하자마자 손자를 안겨준 며느리가 그저 대견한 듯했다. 김씨는 또 며느리가 자손을 넷 정도 낳아주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단지 이틀에 걸친 중국에서의 맞선 이후 몇 차례 편지 왕래 끝에 아버지와 함께 낯선「남한 총각」을 찾아와 지난해 8월 결혼식을 올린 아내 오숙분씨(24)의 가슴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멍이 드는 듯했다.
『아기를 낳은 후 부쩍 부모님과 형제들이 보고 싶다』는 그는 고향이 생각날 때는 시어머니가 보지 않는 비닐하우스 등에서 실컷 운다고 했다.
중국 요령성 농가에서 2남2녀의 셋째로 태어난 그는 길림성 이통현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맞선 당시 봉제공장에 다녔던 「직장여성」 출신.
같은 공장에 다니는 조선족 아주머니가 권유해 맞선자리에 나오게 됐다.
이 맞선자리는 「농촌총각 도시처녀 짝짓기 사업」을 벌여온 사단법인 가정복지연구회가 이 또한 여의치 않자 중국까지 건너가 조선족 처녀들과의 만남 기회를 마련한 것.
이 회는 91년3월부터 93년6월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한중 맞선자리를 마련, 그간 40쌍의 한중부부를 탄생시켰다.
오씨는 결혼전 남한을 중국보다 생활수준이 나은 곳 정도로 막연히 알고 있었다고 했다. 집안에서 중국말을 써 한국말도 아주 서투른 상태였던 그는 남자답고 수수한 이씨가 마음에 들어 한국으로 시집갈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딸이 자주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시집가는 것을 부모가 만류하고 한국에 다녀온 큰아버지가 부정적인 얘기를 했지만 오로지 이씨만을 보고 외로운 용단을 내리게 된 것.
막상 와보니 한국이 남성 위주의 사회인데다 한국 여성들이 너무 고되게 사는 것 같았다.
그는 남편이 남자답게 생겨 아내 일을 잘 도와줄 줄 알았으나 『남자는 남자 일이 따로 있다』며 전혀 도울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막상 일을 좀 시켜보려 해도 시어머니 눈치가 보여 그만둔다고 했다. 그는 그동안 서울·부산 등 도시나들이도 해봤지만 집이라도 제대로 장만한 사람이 아니면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현재 2천평의 비닐하우스(대부분의 땅은 빌린 것이라고 함)에서 수박·토마토 등을 가꿔 연 2천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는데 거의 하루종일 일속에 빠져 산다고 했다.
집에서 한시간 거리에 역시 농촌총각과 결혼한 조선족 친구가 살고 있어 가끔 만나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는 오씨는 아기가 돌이 되면 남편이 친정 집에 한번 가잔다며 금방 환한 얼굴이 됐다.
이들은 이제 태어난지 한 달이 약간 넘은 아기의 이름을 한국과 중국을 오간 사랑의 결실이라고 해 「한중」이라 지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족 처녀들에게 이 같은 한중결혼을 권유하겠느냐는 물음엔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동=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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